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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사이, 하루를 살아가는 두 은혜


이른 아침, 노트 한 권을 펴놓고 두 단어를 적어 보았다. 칭의(稱義), 그리고 성화(聖化). 익숙한 신학 용어 두 줄을 사이에 두고, 진하게 끓인 보리차 한 잔이 김을 올리고 있었다. 책장에 오래 꽂혀 있던 신학개론을 다시 펼친 까닭은 어려운 논쟁을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어제 하루 동안 마음 한구석에 떠나지 않았던 한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어째서 오늘 또 이렇게 흔들리는가. 답은 책 안에서 찾기 전에, 두 단어 사이의 간격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학은 늘 책상 위가 아니라, 어제와 오늘 사이의 좁은 틈에서 가장 또렷이 보인다.

두 단어 사이의 간격을 자주 잊는다. 일상의 언어는 하나의 결심으로 모든 변화가 끝난다고 말하는 데 익숙하다. “결단했어요”, “확신해요”, “정리됐어요”라는 한 줄이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흔한 방식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결심의 끝을 한 점이 아니라 한 길로 그린다. 한 번에 끝나는 자리는 칭의이고, 평생 이어지는 자리는 성화이다. 그 길고 짧은 두 시제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흔들리며 또한 자란다. 흔들림은 결코 부끄러움이 아니며, 자람은 결코 자기의 자랑이 아니다.

펼쳐진 성경 페이지에 비친 햇살

칭의는 한 번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그 선언은, 우리의 변화 정도에 의지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조금 더 정돈된 사람이 되었기에 받은 인정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우리의 부족이 가장 또렷이 드러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가 우리를 덮으셨다. 그래서 칭의는 늘 과거형이다. 이미 일어난 일, 이미 받은 신분, 이미 옮겨진 자리. 새벽 식탁 앞에서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천천히 곱씹는다. 의롭다 하심은 내가 만든 옷이 아니라, 그분이 입혀 주신 옷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로마서 5장 1절

성화는 그러나, 시제가 다르다. 그것은 늘 진행형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인생 전체에 걸쳐 천천히 일어나는, 길고 긴 빚어 가심이다. 어제 작은 거짓말 한 줄에 마음이 무거웠던 일, 오늘 아침 누군가의 메시지에 너무 빨리 날카로워졌던 일, 며칠째 마음 한쪽에 묻어 둔 미움 한 자락. 그 모든 자리에서 그분의 손길은 여전히 빚으시는 중이다. 칭의가 한 번의 선언이라면, 성화는 매일의 빚어짐이다. 한쪽은 이미 끝난 자리에서 우리를 든든히 붙들고, 다른 한쪽은 아직 끝나지 않은 자리에서 우리를 끌고 가신다.

두 단어가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우리의 신앙 생활은 늘 한쪽으로 기운다. 칭의만 강조하면 변화 없는 은혜가 되어,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은 모습 위에 면죄부가 덧입혀진다. 성화만 강조하면 끊임없는 자기 점검이 되어, 우리의 매일을 그분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분투의 무게로 견뎌야 한다. 신학이 두 단어를 굳이 함께 다루는 까닭은, 우리의 매일을 위해서다. 우리는 매일 그 두 자리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한쪽이 빠지면, 다른 한쪽도 흔들린다.

로마서는 이렇게 두 단어를 한 호흡으로 잇는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는 그분과 화평을 누리고, 그 화평 위에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를 배우며,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신앙의 일상은 이 한 줄을 따라 흘러간다. 어제의 환난은 오늘의 인내가 되고, 오늘의 인내는 내일의 소망이 된다. 칭의의 자리에서 출발하지 않고는 성화의 자리에 머물 수 없다. 성화의 자리에서 자라지 않고는 칭의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두 자리는 서로의 뒷받침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 안에서만 자기 자리를 찾는다.

이 두 단어 사이에서 자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모범생도 아니고, 큰 회심을 한 사람도 아닌, 그저 평범한 새벽 기도 자리에서 자주 만나던 한 권사님이었다. 그분은 늘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자세로 작은 손수건을 무릎에 올려놓고 기도하셨다. 어느 날 곁에서 들은 그분의 기도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저는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멀었습니다.” 그 한 줄에는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들어 있었다. 이미와 아직, 그 두 자리에서 자기 자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기도였다. 신학이 곧 일상이 되는 자리, 그 권사님의 새벽이 그러했다.

책상 위에 놓인 성경과 묵상 노트

식탁 앞에서 자주 떠올리는 한 구절이 있다. 빌립보서의 짧은 한 줄,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는 말씀이다. 성화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한 줄은 늘 다시 알려 준다. 우리의 분투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분투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우리의 작은 분투를 받아들이시고, 그 안에서 다시 일하신다. 결심은 우리의 몫처럼 보이지만, 결심하게 하시는 분이 그 안에 계신다.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은혜의 그릇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빌립보서 2장 13절

그래서 칭의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성화는 우리에게 길을 준다. 안식 없는 길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길 없는 안식은 우리를 멈추게 한다. 두 자리는 함께 있어야 한다. 어제의 실패가 오늘의 정죄로 이어지지 않는 까닭은 칭의가 우리를 붙들기 때문이다. 오늘의 평안이 내일의 게으름으로 이어지지 않는 까닭은 성화가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신학은 종종 멀리 있는 학문처럼 보이지만, 한 단어 한 단어가 우리의 식탁 위에 가만히 내려와 앉을 때, 그것은 가장 가까운 위로이자 가장 분명한 부르심이 된다.

오늘 하루는 이 두 자리에서 살아 보고 싶다. 어제의 부족 앞에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고, 칭의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오늘의 편안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성화의 자리로 한 걸음 옮긴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미 의롭다 하시고, 동시에 오늘도 빚어 가신다. 한 손으로는 우리를 붙드시고, 다른 손으로는 우리를 빚으신다. 그 두 손 사이에서 하루가 흘러간다. 어쩌면 우리의 평범한 하루는, 그 두 손 사이의 좁은 길을 한 걸음씩 옮기는 일에 가깝다.

노트를 덮으며 마지막에 한 줄을 적어 두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아가는 하루.” 칭의의 이미와 성화의 아직 사이에서, 우리는 평생을 산다. 이 한 줄을 마음에 적어 두고 식탁에서 일어선다. 오늘은 어떤 자리에서 어떤 작은 빚어짐이 일어날까, 조용한 기대를 품고 하루를 시작한다. 두 은혜는 오늘도 함께 흐르고 있다. 그 흐름 위에 앉아, 흔들리되 떠내려가지 않는 하루를 살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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