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반, 창밖은 아직 어둑하다.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식탁 앞에 앉으면, 새 한 마리가 처음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한 손에는 성경이, 다른 손에는 어제 적어 둔 메모지가 놓여 있다. 자다 깬 사람의 얼굴로 펼친 누가복음 5장은, 마치 어제 밤늦게 덮어 두고 잠든 호숫가의 풍경처럼 다시 펼쳐진다. 이른 아침 게네사렛 호수의 잔물결, 빈 그물을 씻고 있던 어부들 곁으로 한 분이 천천히 다가오신다. 본문은 먼 옛이야기 같지만, 본문이 먼저 우리에게로 다가온다. 식탁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그 풍경 안으로 들어가 본다.
그날 호숫가는 분주했다. 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께로 몰려들었고, 어부들은 막 밤일을 마치고 그물을 정리하던 시간이었다. 풍어와 빈손, 기대와 피로가 한 자리에서 부딪히던 새벽이었다. 그 사이로, 예수께서는 두 척의 배 가운데 베드로의 배에 올라 자리를 빌리신다. 가르치시기에 좋은 자리, 동시에 가장 낮은 자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시는 자리이기도 했다. 말씀은 늘 그렇게 우리의 일상의 도구 위에 잠시 머무신다. 책상 위, 식탁 위, 운전대 위, 우리가 살아내는 자리 그 어디든.

말씀의 자리는 거창하지 않다. 베드로의 작은 배 한 척, 갓 씻어 정리해 둔 그물, 발끝에 닿는 모래의 차가움. 예수께서는 그 배에 올라 잠시 자리를 빌리신 다음,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다. 그러고 나서, 가르침이 끝난 자리에서 한마디를 건네신다. 그 한마디는 늘 우리의 익숙한 자리를 흔든다. 어제까지 익숙했던 작업의 동선, 어제까지 옳다고 믿었던 판단의 폭, 어제까지 머물렀던 자리의 깊이를. 그분의 말씀은 늘 한 걸음 더 깊은 곳을 가리키신다. 들으면 마음이 한 번 가라앉는 그 한마디는, 들은 사람을 결국 한 걸음 더 깊은 자리로 옮겨 놓는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 누가복음 5장 4–5절
베드로의 대답에는 두 개의 마음이 함께 있다. 하나는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다는 솔직한 피로감이다. 또 하나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는 신뢰의 결단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는다. 어부로 살아온 시간, 호수의 결을 읽어 온 손끝의 감각, 헛수고로 끝난 새벽의 무거움을 모두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그물을 내리기로 마음을 정한다. 신앙은 경험을 모른 척하는 일이 아니라, 경험을 모두 안은 채로도 한 번 더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베드로의 한 줄은, 언제 들어도 우리의 어깨 위로 천천히 내려앉는다.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한 마디 앞에서 오래 멈춘다. 그것은 자기 판단을 잠시 옆으로 두는 일이다.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통찰이 가장 잘 안다고 믿어 온 분야 앞에서, 한 번 더 그분의 말씀을 자리로 모셔 두는 일이다. 베드로에게 호수는 자기 영역이었다. 그 영역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자기의 익숙함보다 그분의 말씀을 한 뼘 더 신뢰한다. 우리에게도 자기 영역이 있다. 직장의 일, 가정의 일, 사역의 일, 오랫동안 길을 내어 온 자리. 그 자리야말로 늘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한 줄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자리다.

“깊은 데로”라는 말이 오랜 시간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깊은 데는 단지 호수의 더 먼 자리를 뜻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에게 깊은 데란, 한 번 더 내려가야 할 두려움의 자리, 한 번 더 들여다봐야 할 관계의 자리, 한 번 더 멈추어 기다려야 할 기도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익숙해진 얕은 기슭에서 우리는 안전을 느끼지만, 그 안전 속에는 종종 빈 그물이 함께 머문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더 깊은 자리로 한 걸음을 권하신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새로운 사귐이 시작되고, 새로운 부르심이 들려온다. 깊음은 두렵기에, 깊음은 또한 거룩하다. 두려움과 거룩은 종종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이 본문이 단지 풍어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 까닭은, 결말이 그물을 채우는 데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가득 찬 그물 앞에서 도리어 무릎을 꿇는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그의 고백은, 풍요 앞에서 자기의 빈 깊이를 더 절실히 본 사람의 말이다. 우리는 종종 응답이 늦어지는 자리에서 자신의 부족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본문은 응답이 가득 부어진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자기의 깊이를 본다고 말한다. 풍성하신 그분 앞에서, 자기 안의 좁음을 덮을 길이 없을 때, 비로소 정직한 무릎이 꺾인다. 그리고 그 무릎 꿇음 위에 새 부르심이 임한다.
그분의 응답은 떠나심이 아니라 부르심이다. “이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우리에게 깊은 데로 내려가라 하시는 까닭은, 거기에서 우리의 가장 낮은 자리를 만나게 하시고, 그 낮음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길로 다시 보내시기 위함이다. 가득 찬 그물은 베드로의 손에 오래 남지 않았다. 곧 그물도 배도 두고, 그분을 따라 또 다른 깊은 데로 발걸음을 옮긴다. 풍요는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자의 출발선이 된다. 그래서 응답은 늘 또 한 번의 부르심으로 이어진다.
잠시 본문을 덮고, 식탁 위에 손을 모은다. 깊은 데로 내려가는 일은 한 번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오늘 우리에게 깊은 데란, 미루어 두었던 한 통의 사과 전화일 수도 있고, 한참 미뤄 두었던 어떤 결정의 한 발일 수도 있고, 두려워 닫아 두었던 기도제목 한 줄일 수도 있다. 그 작은 자리에서부터 그물을 한 번 더 내려 보는 일, 그것이 오늘의 응답이다. 큰 결단은 늘 작은 순종 위에 자란다. 작은 순종은 늘 한 줄의 말씀에 의지한다.
오늘 새벽, 식탁 앞에서 펼친 이 한 본문을 천천히 다시 덮는다. 익숙한 기슭에서 떠나기 두려운 마음, 한 번 더 시도하기에는 이미 지친 마음, 빈 그물을 들고 돌아온 어제의 무거움까지 모두 그분께 가만히 내려놓는다. 이 한 마디만 남기고 싶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깊은 데가 어디인지 아직 다 알지 못해도, 그분께서 권하시는 그 한 걸음을, 오늘 하루의 자리에서부터 옮겨 보고 싶다. 새 한 마리의 첫 울음 위로, 동이 트기 시작하는 창밖의 빛 위로, 그 작은 결심을 가만히 띄워 놓는다. 그분께서 보시는 깊이는, 우리의 두려움보다 늘 한 뼘쯤 더 너른 자리에 있다. 오늘 하루는 그 한 뼘에 기대어 살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