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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갠 아침의 골목길에서 — 일상이 건네는 작은 위로


밤새 비가 내렸다. 새벽녘에 잠시 깨어 창밖을 보았을 때, 가로등 불빛 아래로 빗줄기가 비스듬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니 어느새 비가 그쳤고, 골목 끝에 잿빛 하늘과 옅은 푸른빛이 함께 걸려 있었다. 우산을 들지 말지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빈 손으로 나섰다. 어쩐지 오늘은, 비가 멎은 골목을 두 손이 자유로운 채 천천히 걸어보고 싶었다.

한 발자국 내딛으면 발끝에서 가벼운 물기가 느껴졌다. 보도블록 위에는 작은 웅덩이마다 하늘이 한 조각씩 담겨 있었다. 평소에는 그저 디디고 지나갔을 자리들이 오늘은 작은 거울이 되어 있다. 사람의 발길이 지나면 잠시 흔들렸다가 다시 잔잔해지기를 반복하는, 그 작은 호흡 같은 풍경이 마음을 가만히 끌어당겼다. 골목 모퉁이에는 누군가 내놓은 화분에서 분홍빛 꽃잎이 두어 장 떨어져 비에 젖어 있었다. 떨어진 꽃잎조차 오늘은 누추하지 않고, 어쩐지 한 폭의 그림처럼 온순했다.

햇살 깃든 골목 끝 창가
골목 끝 창가에 살며시 내려앉은 아침 햇살.

골목 안쪽 작은 분식집 처마 아래에서는 한 할머니가 전을 부치고 있었다. 빗방울이 처마에서 똑똑 떨어지는 소리와 기름 위에서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익숙한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음악이 숨어 있었는지 비로소 느껴졌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 소리들을 그저 배경으로 흘려보내며 산다. 아침의 분주함, 약속에 늦지 않겠다는 마음, 머릿속을 채우는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불안. 그 모든 것이 골목의 소리를 덮어버리는 두꺼운 외투처럼 우리를 감싼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시도소이다.”

— 예레미야애가 3:22-23

예레미야의 이 고백은 폐허가 된 도시 한복판에서 흘러나왔다. 무너진 성벽 사이로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다만 새벽이 다시 왔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하나님의 인자가 무궁하다고 말했다. 비 갠 아침 골목길을 걸으며 문득 그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에게 매일 새벽이 다시 오는 것은 너무 당연해서, 그 사실 자체가 은혜라는 것을 자주 잊는다.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그 한 줄이 골목 끝에서 가만히 마음을 두드렸다.

골목 한 켠 작은 카페 앞을 지나는데, 유리창 안쪽 화병에 어제의 안개꽃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잎 끝이 살짝 시들었지만, 빛이 들어오는 자리에 놓여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꽃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싶었다. 어제의 피로와 어제의 실수와 어제의 슬픔을 안고도, 다만 빛이 드는 자리에 자기를 놓아두기로 결심하는 것. 그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가장 작은 신앙의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시들어도 자리를 지키는 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 자리 자체가 이미 한 편의 묵상이었다.

은혜는 거창한 깨달음으로 임하기보다, 자주 이렇게 잔잔한 풍경 속에서 우리를 두드린다. 아침에 다시 눈을 뜨게 한 일, 따뜻한 물 한 잔, 누군가의 짧은 안부 인사, 우산 없이 걸어도 괜찮은 하늘. 이런 것들을 일상이라 부르며 우리는 지나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이 매일 아침 새롭게 받는 선물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 큰 표적을 주시는 분이기보다,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시는 분에 가깝다. 마치 비 갠 골목길에 다시 떠오르는 햇빛처럼.

고요한 산책길과 들꽃
비가 그친 뒤의 고요한 산책길에 피어 있던 들꽃.

골목길 끝에서 한 아이가 작은 우산을 든 채 깡총깡총 뛰고 있었다. 비가 그쳤는데도 우산을 펴 들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어쩌면 어제의 비를 추억으로 들고 가는 아이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은 비가 그치자마자 우산을 접지만, 아이는 우산을 펴고 한 번 더 걷는다. 어른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아이는 아직 손에 쥐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 앞에서 마음의 어떤 모서리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발을 옮기자 골목 안쪽에서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오래된 찬송이었다. 누구의 집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잠깐의 멜로디만으로도 마음 한 켠이 가만히 따뜻해졌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신앙이 골목 한 자락을 통째로 데우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 속 신앙도 어쩌면 그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거창한 선포가 아니라, 골목길에서 우연히 들리는 한 마디 찬송 같은 것. 누군가는 그 한 마디로 오늘을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처음 가 본 길로 돌아가 보았다. 익숙한 동네인데도, 골목 하나만 새로 들어서면 모든 풍경이 낯설다. 신앙도 그렇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어도, 한 줄의 말씀, 한 번의 기도, 한 명의 사람을 통해 전혀 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매일 아침이 새로운 이유는 시간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사랑이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도착하기 때문이다.

집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다시 빗방울이 한두 점 떨어졌다. 처음 나왔을 때와 거의 같은 풍경인데, 마음의 자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비가 와도 좋고, 비가 멎어도 좋고, 다시 와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날씨가 와도 그 자리에 인자하심이 새로 깔려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오늘 골목길이 내게 가르쳐 준 작은 위로였다. 일상은 사실 가만히 보면 매일 작은 기도문 같다. 길이 짧고 문장이 단순해도, 그 안에 충분한 깊이가 흐른다.

오늘 하루도 어쩌면 골목길처럼 펼쳐질 것이다. 갑자기 비가 올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풍경에 발길을 멈출 수도 있다. 그 모든 자리에서 다만, 매일 아침마다 새롭다는 그 옛 고백을 되뇌며 걷고 싶다.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그 한 줄에 기대어. 비 갠 아침 골목길은 오늘도 누군가에게 같은 위로를 건네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골목길에도 오늘, 그렇게 잔잔한 빛이 깃들기를 바란다. 오늘 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가지 않기를, 한 발자국마다 작은 새로움이 깔려 있기를, 그렇게 매일 아침이 다시 한번 받는 선물로 다가오기를. 그 기도 한 줄을 마음에 새기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오늘 하루 작은 골목 한 자락이 허락되기를 바란다. 분주한 일정 사이에 잠시 발걸음을 늦추고, 처마 끝의 빗방울 소리, 보도블록 위에 담긴 하늘 한 조각, 골목 끝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짧은 인사말 같은 것들을 마음에 담아 보면 좋겠다. 그 작은 풍경들이 사실은 매일 새로운 인자하심으로 우리에게 도착하는 편지라는 것을, 나는 오늘 비 갠 골목길에서 다시 한번 받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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