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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한 송이의 그늘 — 오월 산책길에서 만난 들꽃 묵상

sangkist

오월의 산책길을 걷다 보면 보도블록 사이마다 작은 노란 점들이 박혀 있다. 누가 의도해서 심은 적도 없는 자리에, 누가 거름을 준 적도 없는 자리에, 민들레가 말없이 피어 있다. 오늘 점심 무렵, 회사 근처 골목길을 걷다가 그 중 한 송이 옆에 잠시 쪼그려 앉았다.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분명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마흔 가까운 사람이 길바닥에 앉아 노란 풀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은, 도시의 평일 점심에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그러나 그 잠시의 어색함을 무릅쓰고 보았던 그 한 송이가, 오후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민들레의 노란색은 화려하지 않다. 무리 지어 군락을 이루는 꽃이 아니라, 한 송이씩 띄엄띄엄 박혀 있는 꽃이다. 그 한 송이가 차지하는 자리는 손바닥보다도 작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송이 안에 노란 꽃잎이 수십 장씩 겹쳐져 있다. 한 송이가 곧 한 다발이다. 작은 자리에 작게 피어 있어도, 그 안에는 다발이 들어 있다. 작음과 풍성함이 동시에 들어 있는 그 모순이, 묘하게 위로가 된다. 작아도 풍성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자리는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고 그저 보여준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장 28-29절)

들의 백합이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라는 그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늘 한 가지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첫 번째 권유는 분석이 아니라 관찰이라는 것. 들꽃의 영양 성분을 분석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저 어떻게 자라는지 한참을 들여다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너무 빨리 분석으로 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한 송이 꽃을 보아도 그 학명을 검색하고, 한 사람을 만나도 그의 직책과 연봉을 짐작한다. 분석은 빠르다. 그러나 관찰은 느리다. 그분의 위로는 분석의 속도가 아니라 관찰의 속도로 우리에게 도착한다.

회사 근처 골목길의 그 민들레는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는 자리에 피어 있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끝에 닿을 듯 말 듯한 자리, 점심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의 종아리 옆을 흘끗 스칠 자리. 그 자리는 화단도 아니었고 정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노란 꽃잎이 수십 장 겹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정원의 호화로움보다 훨씬 더 깊은 정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정성은 자리의 화려함이 아니라 자리에 머무는 마음의 농도로 측정된다.

길 가운데 핀 작은 노란 들꽃

요즘 나는 자주 염려한다. 의복에 대한 염려는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자리에 대한 염려다. 직장에서의 자리, 가정에서의 자리,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자리. 그 자리들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가끔 마음 깊은 곳에서 흔들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 큰 자리를 욕망하는 사람이 된다. 더 화려한 자리, 더 안전한 자리, 더 오래 보장되는 자리. 그러나 민들레는 그런 자리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한 뼘의 자리에서 노랗게 피고, 어느 날 흰 갓털로 흩어진다.

그분께서는 솔로몬의 영광을 들의 한 송이 꽃과 비교하셨다. 그 비교는 우리 시대의 어법으로는 거의 농담처럼 들린다. 한 사람의 일생의 영광이 한 송이 꽃 하나만도 못하다는 것은, 노력과 성취를 신앙처럼 떠받드는 시대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제다. 그러나 그 농담 같은 말씀이, 진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한 송이 꽃이 입고 있는 그 노란색은 왕의 보석함에서 꺼낸 색이 아니라, 하늘이 직접 그 꽃잎에 옮겨 그린 색이라는 것을, 마음이 평온할 때면 누구나 직감으로 받아들인다.

오후의 햇살이 길게 기울어진다. 산책길을 걸어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약속을 한다. 오늘 하루는, 자리의 크기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기로. 한 사람의 자리가 골목길의 민들레처럼 작아 보일지라도, 그 자리 안에 노란 꽃잎이 수십 장 겹쳐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잊지 않기로.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자리에 대해서도, 더 큰 자리를 욕망하기 전에 지금 이 자리에 얼마나 노랗게 피어 있는지 한 번 더 들여다보기로.

민들레의 흰 갓털은 바람에 흩어진다. 어디로 가는지 그 꽃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흩어짐이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로 보이는 까닭은, 그 자리를 채우신 분이 다음 자리도 채우실 것을 그 꽃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않는 자세가 곧 신앙이라는 것을, 들꽃은 짧은 봄과 짧은 일생으로 우리에게 가르친다. 사람이 평생을 들여 배우는 그 한 가지를, 들꽃은 며칠 안에 다 살아낸다.

사무실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면, 다시 일정과 회의의 목록이 펼쳐진다. 그 목록 위에서 나는 곧 오늘 점심의 민들레를 잊을 것이다. 잊는 일은 어쩔 수 없다. 도시의 일상은 잊기를 강요하는 구조 위에 세워져 있으니까. 그러나 잊는 일이 끝은 아니다. 다음 산책길에서 또 한 송이를 만날 것이고, 그때 다시 잠시 쪼그려 앉을 것이다. 잊고, 다시 만나고, 다시 잠시 멈추고, 또 잊는 일의 반복 속에서 신앙은 천천히 두꺼워진다. 두꺼움은 한 번의 깨달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잊고 다시 만나는 그 반복의 누적이 두꺼움이 된다.

저녁이 오면 다시 그 골목길을 지나갈 것이다. 그 민들레는 아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다. 누구도 그 꽃을 옮기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그 꽃을 꺾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어둠 속으로 잠기다가, 내일 아침 다시 노랗게 피어날 것이다. 그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 어쩌면 가장 깊은 기도의 모양일지도 모른다. 자리에 머무는 일, 그 자리에서 노랗게 살아 있는 일, 그리고 어느 날 흰 갓털로 자유롭게 흩어지는 일. 그 세 동작이 한 송이의 일생이 된다.

며칠 전 동료 한 사람이 내게 자기 일에 대한 작은 회의를 털어놓았다. 자신이 하는 일이 너무 사소해 보인다고, 더 큰 회의실에서 더 큰 결정을 하는 사람들 옆에 있으면 자신은 자꾸 작아진다고. 그 말 앞에서 나는 별다른 위로의 문장을 찾지 못했다. 단지 그 사람의 자리에서,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정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을 뿐이었다. 사소함과 정성의 차이는 쉽게 측정되지 않는다. 그 차이는 오직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만이 안다. 그래서 위로는 늘 시간이 걸리고, 자세히 보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그 위로를 전할 수 있다.

민들레의 잎은 톱니 모양이다. 자세히 보면, 그 톱니 하나하나가 한 방향으로 누워 있다. 무작위가 아니다. 작은 잎 하나에도 질서가 있다. 자연이 무심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모든 것에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보는 눈은 신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우연처럼 보이는 자리에 정성이 있다는 것을 보는 눈, 사소해 보이는 일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보는 눈, 작은 자리에 큰 사랑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보는 눈. 그 눈은 훈련 없이는 잘 떠지지 않는다.

가끔 나는 회사 옥상에 올라가 멀리 도시의 능선을 바라본다. 빼곡한 건물들 사이에 좁은 골목들이 있고, 그 골목마다 누군가의 일터가 있고, 그 일터마다 누군가의 한 송이가 피어 있을 것이다. 도시 전체를 한 송이씩의 민들레로 환원해서 본다면, 그 도시는 결코 무심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니다. 도시는 작은 노란색들의 합이다. 그 합을 보지 못하는 시선이 도시를 차갑게 만든다. 그 합을 볼 줄 아는 시선이 도시를 다시 따뜻하게 만든다. 신앙은 큰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작은 것들의 합을 알아보는 눈을 길러 주는 일에 더 가깝다.

오늘 점심의 그 작은 만남을, 짧은 일기처럼 적어 둔다.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작아도 풍성한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들의 한 송이만도 못한 우리의 영광에 대하여. 그런데 그 비교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위로다. 한 송이의 노란색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분께서, 우리에게도 한 사람만큼의 노란색을 입혀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그 비교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약속을 의심하지 않는 일, 그것이 오늘의 산책길이 내게 남긴 작은 결심이다. 한 송이의 노란색을 의심하지 않는 일이 결국 한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일로 이어지고, 한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일이 결국 그분을 의심하지 않는 일로 이어진다는 것을, 오월의 보도블록 사이가 가만히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