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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일곱 시 반, 베란다에 앉아 — 잠잠히 듣는 시간에 대하여

sangkist

저녁 일곱 시 반, 베란다 한 켠의 작은 의자에 앉는다. 하루의 일이 다 정리된 시간이라기보다는, 오늘의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잠시 한쪽으로 밀려난 시간이다. 식기 정리도 끝났고, 메일 확인도 마쳤고, 어른들의 안부 전화도 한 번씩 돌렸다. 이제 한 시간쯤은 누구의 호명에도 즉답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가 잠시 열린다. 베란다의 미닫이문을 닫고, 화분 두어 개와 마주 앉는다. 오늘은 의도적으로 휴대전화를 거실에 두고 나왔다. 그 작은 결심이 오늘의 영성 일기의 첫 줄이 된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편 46편 10절)

가만히 있으라는 그 말씀 앞에서 가장 많이 흔들리는 것은 사실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몸은 의외로 쉽게 멈춘다. 의자에 앉으면 앉고, 침대에 누우면 눕는다. 그러나 마음은 같은 자세 안에서도 계속 움직인다. 끝나지 않은 회의의 한 장면이 떠오르고, 미처 답하지 못한 메시지의 빈 칸이 떠오르고, 내일 아침의 일정이 머릿속에서 미리 시연된다. 마음의 가만함은 마음이 일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이 자기 일을 잠시 다른 손에 맡길 줄 아는 상태에 더 가깝다.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넘어갔다. 그러나 하늘은 아직 완전히 어둡지 않다. 짙은 푸른색 위에 분홍빛 한 자락이 길게 누워 있다. 노을이라기보다는 노을의 잔상이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린다. 잔상은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의 사이에 머무는 색이다. 본 것은 이미 지나갔고, 보지 않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 사이의 잠시가 잔상이다. 인생의 많은 순간이 사실은 잔상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 사이에 잠시 머무는, 그 흐릿한 시간.

베란다의 작은 의자와 화분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그 명령은, 가만히 있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주함의 한가운데에서는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인식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모든 것을 처리하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분의 자리를 종종 잠시 잊는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씀은 일을 멈추라는 권유이기 전에, 자리를 다시 알아보라는 권유다. 누구의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라는 다정한 호명이다.

베란다의 화분 중 한 개에는 작은 다육이 한 포기가 자라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쯤만 물을 줘도 잘 자란다. 며칠에 한 번씩 들여다보면, 보일 듯 말 듯 새 잎이 한 장씩 늘어 있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멈춰 있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늘 자라고 있다. 자람은 우리가 보지 않는 시간 동안 일어난다. 신앙도 그런 결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한껏 힘을 주어 자라려고 애쓰는 시간보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 그저 햇볕을 쬐는 시간 안에서 더 깊은 곳이 자라난다.

오늘 하루의 일들을 떠올려 본다. 잘한 일이라 생각되는 것은 의외로 적고, 어쩌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나 싶은 일이 더 많다. 그러나 그 평가의 자리에서, 나는 곧 한 가지를 깨닫는다. 평가는 가만함의 일이 아니라는 것. 평가는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고, 가만함은 평가를 잠시 미뤄 두는 일이다. 오늘 하루의 잘잘못을 정리하기에 일곱 시 반은 너무 이른 시간이거나 너무 늦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영성 일기의 첫 자리에서, 평가보다는 호흡이 먼저여야 한다고 본문은 일러 준다.

가만히 호흡하다 보면,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린다. 멀리 어느 집의 식기 부딪히는 소리, 골목길을 지나가는 자전거의 짧은 종소리, 아래층 어디쯤에서 켜진 텔레비전의 아주 작은 음성. 내가 가만히 있을 때 도시의 작은 소리들은 더 또렷해진다. 그 소리들 사이에서, 나의 분주함이 만들었던 잡음이 잠시 벗겨진다. 가만함이란 침묵이 아니라, 들을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자기 소리를 줄여 다른 소리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분께서 하나님 되심을 알라고 하실 때, 그 앎은 책상에서 얻어지는 앎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 다른 소리를 들어 본 사람만이 받게 되는 앎이다. 책상에서 얻는 앎은 정의되고 분류된다. 그러나 베란다에서 얻는 앎은 정의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마음 한가운데에 천천히 자리를 잡는다. 정의되지 않은 채로 깊어지는 것들이 있다. 신앙의 가장 단단한 부분은 늘 그런 정의되지 않은 자리에 들어 있다.

화분이 놓인 발코니의 풍경

가만함의 시간 안에서 가장 자주 떠오르는 사람은 사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가장 빨리 흐려지는 윤곽을 가지고 있다. 너무 익숙해서 잘 보이지 않는 얼굴, 너무 자주 마주쳐서 새삼스레 들여다보지 않게 되는 표정. 가만히 앉아 그 얼굴들을 다시 그려 보려 할 때, 의외로 한 사람의 표정 한 자락이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흐려진 윤곽 앞에서 나는 작은 미안함을 갖는다. 가까이 있다는 것이 곧 자세히 보고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만함의 시간이 늘 다시 일러 준다.

오늘 저녁의 가만함 안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얼굴 한 자락이 마음에 떠오른다. 오늘 하루 그 사람에게 충분히 자세히 시선을 주었는지, 그 사람의 작은 표정 한 자락을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받아들였는지 돌아본다. 아마도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족함을 평가의 자리로 끌고 가지 않으려 한다. 영성 일기는 평가의 일이 아니라 호흡의 일이라고 다시 한 번 자기에게 일러 준다. 다음 호흡에서 한 번 더 자세히 보면 된다. 그 정도의 가능성이면 오늘의 부족함을 견딜 수 있다.

며칠 전 한 친구가 말했다. 자기는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잠시라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가 흐려지는 것 같아서, 자꾸 일정을 채우게 된다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같은 마음을 인정했다. 가만함이 두려운 이유는 한가함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가만함의 자리에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다. 분주함은 자기 자신을 보지 않아도 되는 가장 정중한 핑계가 되어 준다. 가만히 앉으면, 핑계가 떨어진 자기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드러남이 두려워 우리는 일을 만든다. 일이 부족할 때조차, 우리는 일하는 척이라도 한다. 그 분주함의 가면을 잠시 내려놓는 것, 그것이 영성 일기의 시작이다.

옆 건물에 한 등 한 등 불이 켜진다. 누군가는 늦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막 퇴근을 한 모양이다. 그 불빛들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일상을 표시한다. 도시는 결국 한 사람씩의 일상이 모여 만들어진 빛이라는 것을, 베란다의 의자에서 새삼 느낀다. 한 사람의 일상이 작아 보일 때, 그 한 사람의 등 하나가 도시 전체의 빛에 더해지고 있다는 것을 잊기 쉽다. 가만함의 시간은 그 잊기 쉬운 사실들을 다시 마음 안으로 옮겨다 주는 시간이다.

오늘의 일기는 결론을 짓지 않으려 한다. 결론은 평가의 언어이고, 영성 일기는 평가의 언어보다는 호흡의 언어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어딘가에서 읽었다. 그 문장이 오늘 같은 저녁에 더 깊이 와닿는다. 결론 대신, 한 줄의 호흡만 적어 둔다. 오늘 하루도 그분의 자리에 그분이 계셨고, 나의 자리에 내가 있었다.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오늘 일기의 마지막 문장이 된다. 그 단순함이 오늘의 위안이고, 그 위안이 내일의 시작이 된다.

창밖 어디쯤에서 새의 짧은 울음 한 가락이 들린다. 늦은 봄의 새는 낮의 새와 다르게 운다. 짧고, 한 번씩만, 그리고 곧 사라진다. 그 울음을 듣고 있으면, 새의 하루가 어디쯤에서 마무리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새도 가만함의 시간을 갖는다. 우리는 우리만 가만하지 못한 종이라고 자주 자책하지만, 사실 가만함은 자연 전체의 본래 자세에 가깝다. 가만하지 못한 사람의 자세가 자연으로부터 점점 멀어진 결과인지도 모른다. 다시 자연의 자세로 돌아오는 일, 그것이 오늘 저녁의 베란다가 가만히 보여주는 회복의 한 형식이다.

의자에서 일어나기 전에, 한 번 더 본문을 떠올린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그 명령형의 부드러움이 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명령은 차가울 수도 따뜻할 수도 있는데, 이 명령은 분명히 따뜻한 쪽이다. 따뜻한 명령은 거부할 이유를 만들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 잠시 더 머물게 한다. 베란다의 의자가 아주 작아도, 오늘 저녁의 그 자리가 한 사람의 영혼에는 충분히 큰 자리가 되어 주었다. 미닫이문을 다시 열고 거실로 들어가는 동안, 그 가만함의 한 자락이 어깨에 잠시 더 따라 들어온다. 내일 저녁 일곱 시 반에도, 같은 의자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가만함을 다시 내어 줄 것이다. 그 반복이 영성 일기의 가장 정직한 형식이라는 것을, 오늘 저녁의 베란다가 한 번 더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