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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새벽 책상 위에 켜둔 작은 등잔 한 개 — 어둠 속에서 비춘다는 그 한 마디 말씀의 무게


주일 새벽 다섯 시 반, 책상 위에 작은 등잔 한 개를 켜 두었다. 정확히 말하면 등잔이라기보다는 손바닥만 한 무드등이었지만, 새벽의 어둠 가운데 잠시 그 작은 빛은 등잔처럼 보였다. 거실 창밖은 아직 깊은 청회색이었고, 동네는 어디서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고요한 시간에 책상 위에 펼친 성경은 마태복음 5장이었고, 손에 든 펜은 한참 동안 같은 한 구절 위에 머물러 있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새벽이 짙을수록 이 한 마디는 더 무겁게 들린다. 빛이라는 말은 보통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을 가리키는 말처럼 들리지만, 본문이 이어지는 흐름을 보면 그것은 능력보다는 자리에 가까운 단어다. 등불은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두어야 한다고 본문은 이어 말씀하신다. 즉, “빛이라”는 선언은 “이 자리에 두어졌다”는 약속이고, 우리가 어떻게 더 환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권면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어느 자리에 두어진 사람인지를 알려 주시는 말씀이다.

주일 새벽 책상 위 펼친 성경과 작은 등불, 묵상의 자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 마태복음 5:14-15

책상 위의 작은 무드등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빛의 세기가 약해서, 거실 전체를 다 밝히지는 못한다. 책상 모서리와 펜과 노트와 펼친 성경의 한쪽 면만이 환했고, 그 너머는 여전히 어둠 안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작은 빛 아래에서 본문은 또렷이 보였고, 손글씨는 흔들리지 않았다. 새벽의 묵상에는 거대한 빛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 구절을 정확히 비추는 한 평짜리의 빛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등잔이 가만히 가르쳐 주고 있었다.

본문이 말씀하시는 “세상의 빛”도 어쩌면 그런 빛일지 모른다. 단 한 평짜리. 우리 가족 한 명, 옆자리 동료 한 명, 같은 교실의 친구 한 명. 그 작은 자리 위에서 정확히 비추는 빛. 그 빛이 모이면 한 집 전체에 닿는다고 본문은 약속하신다. 그러나 그 약속을 받는 자리에 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내가 빛이라는 사실을 작게라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어둠 안에서 자기 빛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등잔은 자꾸만 말 아래로 숨고 싶어진다.

새벽이 차츰 옅어지자 창밖의 청회색이 옅은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를 한참 바라보면서, 빛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또 다른 결을 생각했다. 빛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을 드러나게 한다. 빛이 켜진 자리에서는 사물이 보이고, 사물이 가진 색이 보이고, 사물이 차지하는 자리가 보인다. 본문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실 때, 그 빛은 “나를 보라”는 빛이 아니라 “그분을 보게 하라”는 빛에 가깝다. 우리의 자리가 환해질수록, 사람들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너머 계신 한 분이시다.

한밤중 책상 모서리에 켜둔 작은 등잔,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닿는 따뜻한 빛

본문은 곧이어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이어진다. 빛의 도착점이 우리의 평가가 아니라 그분의 영광이라는 사실. 등잔의 마음이 잠시 흔들릴 때 늘 다시 돌아와 머물러야 할 단 한 문장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빛을 자랑하기 위해 켜진 것이 아니라, 빛이 닿는 자리마다 그분의 이름이 환해지도록 켜져 있다.

책상 위의 등잔불을 한참 더 켜두고, 그 자리에 앉아 가족의 이름을 하나씩 마음에 적어 보았다. 우리 가정 안에서 “등경 위”의 자리에 두어진 한 사람으로서, 오늘 하루 어떤 빛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새벽의 묵상은 늘 큰 결심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그 작은 등잔이 어두운 책상 위 한 평을 정확히 비추듯, 오늘 하루 내 자리에서 정확히 한 평을 비추겠다는 작은 다짐 정도가 마음에 적혔다.

해가 떠오를 무렵 등잔불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잔불을 끈다고 해서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빛이 일상 안으로 이어지는 자리로 옮겨 갈 뿐이었다. 식탁으로, 출근길로, 사무실의 키보드 앞으로. 새벽의 한 구절이 그날의 자리들 위에 가만히 얹혀 있을 때, 일상은 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환해진다. 본문의 “비추라”는 말씀은 큰 사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등경 위에 두어진 자리를 떠나지 않는 한 사람의 신실함을 요청하실 뿐이다.

오늘 하루도 누군가의 작은 자리에 한 평짜리 빛이 닿기를 마음으로 빌어 본다. 동시에 내가 자주 말 아래로 숨기고 싶어 하는 그 작은 등잔불이, 다시 등경 위로 올려질 수 있기를 함께 빌어 본다. 등잔의 자리는 늘 바깥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등잔의 자리는, 매일 새벽 그 자리를 다시 선택하는 한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된다. 오늘 새벽 다섯 시 반, 그 자리를 한 번 더 선택했다.

책상 위에 펜을 내려놓으니 거실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 시간의 묵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본문의 한 구절이 마음 안에서 한 번 더 자리를 잡았다는 감각만이 남았다. 빛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작고 따뜻하게 다가왔던 새벽은 오랜만이었다. 이 작은 한 평의 빛이 오늘 하루를 따라다닐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어쩐지 조금 든든했다.

아침 햇살이 거실 깊숙이 들어오자 책상 위 등잔의 빛이 비로소 더 작아 보였다. 그러나 새벽에 보았던 그 등잔의 환함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큰 빛이 들어오는 자리에서도, 새벽 한 평을 가만히 비추던 그 작은 빛의 결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일과는 종종 큰 빛만을 따라 움직이지만, 우리의 신앙은 자주 작은 빛 안에서 자라난다. 큰 빛이 가르치지 못하는 결을 작은 등잔불이 가르치고, 큰 모임이 보지 못하는 자리를 새벽의 한 평이 보아 준다. 그 한 평을 매일 다시 지키는 일이, 본문이 말씀하시는 “등경 위”의 자리에 머무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 일어나고 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올 때, 새벽의 묵상은 이미 식탁으로 옮겨 와 있었다. 아내가 차를 따라 주며 “오늘 본문 어땠어?” 하고 묻자, 나는 짧게 “등잔 이야기”라고 답했다. 더 말을 보태지는 않았지만, 그 한 마디 안에 새벽의 모든 결이 담겨 있는 듯했다. 식탁 위의 차 한 잔이 다 식기 전에, 그 작은 빛이 가족의 자리 위에 한 번 더 얹혀지기를 마음으로 빌었다. 빛의 자리는 이렇게, 새벽의 책상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현관문 밖으로 천천히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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