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 분. 부엌 형광등을 켜자, 식탁 위에 어제 저녁 펼쳐 두었던 성경책이 그대로 누워 있었다. 책장은 시편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그 사이에 끼워 둔 얇은 메모지 한 장이 살짝 비스듬히 빠져나와 있었다. 어제 미처 끝맺지 못한 한 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라는 문장이 거기 적혀 있었다.
창밖은 아직 검푸른 빛이었다. 멀리서 첫 새벽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짧게 우는 소리. 그 사이로 식탁 위 펜이 메모지를 긋는 작은 마찰음이 더해졌다. 나는 시편 5편을 다시 펼쳐 들고, 한 줄 한 줄을 손으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르다. 눈은 빠르게 미끄러져 가지만, 손은 결코 빨리 갈 수 없다. 손은 한 자, 한 자를 머무르게 한다. “나의 부르짖는 소리”라는 일곱 글자를 옮겨 적는 동안, 나는 어쩐지 내 안 어딘가에서 오래 묵혀 두었던 한 마디가 함께 빠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부르짖음이라는 단어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평소엔 잘 쓰지 않던 말이었는데, 새벽의 식탁 위에서 그 단어는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시편 5편 3절
“아침에”라는 두 글자에서 잠시 펜이 멈췄다. 그 단어가 마치 작은 문지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아침과 또 다른 누군가의 아침이 같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모든 아침을 통째로 들으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한참 동안 메모지 위에 머물러 있었다. 시편 기자의 아침과, 잠을 설치다 일찍 일어난 내 아침과, 어쩌면 지금 막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누군가의 아침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동시에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바라리이다”라는 말도 좋았다. 바란다는 것은, 아직 손에 쥐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손에 쥐고 있다면 더 이상 바라지 않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여전히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새벽 식탁 위에서, 손에 쥔 것보다 손에 쥐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옆방에서 잠든 식구들의 숨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평일 아침이라면 이미 분주했을 시간, 토요일의 새벽은 그 자체로 한 호흡이 길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런 호흡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아이가 미처 풀지 못하고 식탁 위에 두고 간 수학 문제집 한 페이지. 그 위에 연필로 군데군데 그어진 망설임의 자국들. 그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아이의 어제 하루가, 그 하루의 무게가, 글자 사이로 조용히 떠올라왔다.
나는 그 페이지 위로 잠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시편의 한 구절을 그 위에 살짝 옮겨 적어 보았다.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그 문장을 적는 동안, 아이의 망설임도, 어제 못다 한 한숨도, 함께 누군가에게 들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들리는 것은 큰 소리만이 아니다. 망설인 흔적도, 지운 자국도, 다 쓰지 못한 문장도, 모두 한 분의 귀에 닿는다.
두 번째 잔의 물을 따랐다. 컵 안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작은 기포들이 새벽의 정적과 잘 어울렸다. 메모지 위에는 어느새 시편 5편의 절반 이상이 옮겨 적혀 있었다. 손글씨는 평소보다 조금 더 둥글었다. 새벽의 손글씨는 어쩐지 마음의 모양을 더 닮는 듯하다.
“아침에 내가 주의 앞에 내 사정을 아뢰고”라는 구절을 적고 있을 때였다. 사정이라는 단어가 마치 오래된 가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풀어놓으면 그 안에서 잊고 있던 작은 것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가방. 새벽의 식탁이 그런 가방이라면, 한 번쯤 통째로 뒤집어 놓아도 괜찮은 시간이 아닐까.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나조차도 정확히 모르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식탁 위에는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다. 식구 중 누군가가 사다 둔 줄도 모르는 사이 자리를 잡은 다육이 하나가, 그 화분 안에서 천천히 자라고 있었다. 새벽 식탁 위의 다육이는 햇빛도 거의 받지 못한 채로 매일 조금씩 잎을 두껍게 만들어 왔다. 시편을 옮겨 적는 동안 그 화분 옆을 한 번 가만히 바라보았다.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작은 것의 호흡이, 새벽 식탁 위의 분위기를 한층 더 차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떤 자라남은 빛이 충분해서가 아니라,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 일어난다. 다육이의 잎 한 장 두께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창밖이 조금씩 푸르스름해졌다. 새벽이 아침으로 넘어가는 그 짧은 경계의 시간. 그 무렵에는 모든 소리가 한 번씩 조심스러워진다. 멀리 마을 어귀의 가로등이 마지막으로 한 번 깜빡이고, 어디선가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시편 5편의 마지막 절까지 옮겨 적은 메모지를 가만히 식탁 위에 놓아 두었다.
오늘 하루, 어떤 일이 펼쳐질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새벽 식탁 위에서, 한 줄 한 줄 옮겨 적은 시편의 문장들이, 오늘 하루 사이사이 어딘가에서 한 번씩 다시 떠오를 것임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점심을 먹다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어쩌면 또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어 식탁 앞에 앉게 되었을 때.
물을 끓이는 동안, 식탁 옆 작은 창문 너머로 동네 한 모퉁이를 잠시 내다보았다. 골목길 끝에 새벽 일찍 문을 여는 작은 빵집이 있었다. 그 빵집의 불빛은 늘 다른 가게들보다 한 박자 먼저 켜졌고, 한 박자 먼저 꺼졌다. 새벽 빵집의 불빛은 너무 작아서 큰 의미를 가질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새벽엔가 그 불빛 하나가 한 사람의 하루를 묵묵히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우리가 시편의 한 구절을 손으로 옮겨 적는 행위도, 어쩌면 그 작은 빵집의 불빛과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큰 일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새벽을 정직하게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것.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천천히 올라왔다. 그 소리는 식탁 위에 놓아둔 메모지 위의 글자들과 어울려, 부엌 안의 공기를 한 결로 묶어 놓았다. 차를 한 잔 우려 내어 식탁으로 돌아왔다. 김이 천천히 올라가는 잔 옆에서, 메모지의 마지막 줄을 한 번 더 천천히 읽어 보았다. “내가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이 한 문장이, 다 끝나지 않은 어제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오늘 사이에 가만히 다리를 놓아 주고 있었다.
다섯 줄짜리 짧은 큐티가 끝났다. 길고 화려한 묵상은 아니었다. 다만 손으로 옮겨 적는 동안 마음의 한 자리가 천천히 빛 쪽으로 돌아앉은, 그런 새벽이었다. 새벽이 다 가기 전, 부엌에 다시 한 번 따뜻한 물을 끓이기 위해 일어났다. 식탁 위에는 시편 5편의 글자들이, 펼쳐진 책장 위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침은, 손으로 옮겨 적은 한 줄, 한 줄이 어딘가에 정확히 닿아 있는 그런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