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월의 주일 아침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된다.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흰 시트를 부드럽게 두드릴 때, 다리미의 코드를 풀어 콘센트에 꽂는다. 잠깐 사이 작은 점등 표시가 빨갛게 켜지고, 다리미 면이 서서히 데워지는 동안, 옷장 아래 칸에서 흰 셔츠 한 벌을 꺼낸다. 어제 빨아 말린 셔츠는 어깨와 가슴 사이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다. 마치 한 주간을 어떻게 살았는지 그 주름이 말해주는 것 같은 무게가 있다. 옷걸이에서 셔츠를 내릴 때 손끝에 닿는 천의 결은 살짝 까칠하면서도 여전히 부드럽다. 잘 마른 빨래 특유의 햇살 냄새가 옅게 묻어 있고, 그 향은 그 자체로 한 주간의 피로 위에 얹는 작은 위로가 된다.
다리미의 김이 부드럽게 올라오기 시작하면 오른손에 다리미를, 왼손에 셔츠 끝자락을 잡는다. 깃을 먼저 다리고, 어깨선을 따라 천천히, 그리고 소매로 내려가면서 한 번에 한 부분씩 펴 나간다. 누군가는 이런 행위를 작고 사소한 일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주일 아침의 다리미질은 한 주간 흐트러진 마음을 펴는 일과 닮아 있다. 다리미가 흰 천 위를 미끄러질 때, 깊이 박혀 있던 주름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자리를 두세 번 지나가야 비로소 천이 평평해진다. 그것은 마치 우리 마음의 결도 그러하다는 것을, 한 번의 결심이 아니라 반복되는 정성으로만 펴진다는 것을 가만히 일러주는 듯하다. 김이 천 안쪽까지 스며들어야 주름이 풀리는 것처럼, 마음의 깊은 자리에도 어떤 따뜻한 온기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지나가야 비로소 풀리는 것들이 있다.
다리미의 손잡이 끝에서 가만히 진동이 전해질 때, 나는 어쩐지 평일에 미처 들이지 못했던 한 호흡을 그제야 들이쉬는 듯한 기분이 든다. 평일에는 늘 무엇을 향해 달려가느라 호흡이 짧다. 회의 사이의 5분이 호흡이고, 점심시간이 호흡이고, 저녁 늦은 산책이 호흡이다. 그 짧은 호흡들 사이에 마음의 주름은 점점 깊어지고, 어떤 날은 다리미질로도 펴지지 않을 것 같은 자국이 어깨에 박혀 있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주일 아침은 다르다. 다리미질을 하는 동안의 시간은 조금 더 길고, 손가락 끝에 머무는 정성은 평일의 그것보다 조금 더 깊다.

다림질을 마치고 셔츠를 옷걸이에 걸어 두면, 베란다 창문 너머로 푸른 하늘 한 자락이 보인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길게 운다. 시편 19편의 첫 구절이 떠오른 것은 그때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시편 19:1-2
다윗이 이 시를 부를 때, 그는 화려한 성전의 깊은 곳에 있지 않았다. 다윗은 들녘에 누워 양을 치며, 가만히 별을 바라보던 한 사람이었다. 시편 19편은 작고 평범한 사람이 일상의 자리에서 발견한 거대한 진리다. 하늘은 늘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사실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잠잠해질 때 비로소 들리는 음성이다. 다리미의 진동이 손끝을 떠나고 셔츠가 옷걸이에 걸려 잠시 흔들리는 그 정적 속에서, 우리는 다윗이 들었던 그 음성의 한 자락을 비로소 듣게 된다.
오월 주일 아침의 다림질도 그러하다. 누군가에게는 단지 한 벌의 셔츠를 펴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손길에 정성이 머물 때, 다림질은 일상의 예배가 된다. 우리는 거대한 일에서만 거룩을 발견하지 않는다. 다리미의 김이 올라오는 그 짧은 순간, 흰 셔츠가 햇빛 아래 차분히 펴지는 그 작은 풍경 속에서 하늘은 여전히 자신의 영광을 조용히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거룩을 어딘가 멀리서, 어떤 특별한 의식의 한가운데에서만 만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오히려 가장 평범한 자리에 깃들어 있다. 떡과 잔을 들 때, 발을 씻어 줄 때, 옷을 빨고 다릴 때, 그 평범함의 결을 따라 손길이 정직해질 때.

다림질이 끝난 후 옷장의 거울 앞에 서서 셔츠를 입어 본다. 거울에 비치는 사람은 어쩌면 한 주간 너무 많은 것을 떠안고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회의와 마감과 보고서 사이에서 어깨가 조금 굽었을 것이고, 무언가를 자꾸 미루고 또 잊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자꾸 흐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월 주일 아침에 펴진 흰 셔츠는 그 모든 흔적 위에 부드럽게 덮인다. 마치 은혜가 그러하듯이. 셔츠는 굽은 어깨를 곧게 만드는 마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굽은 어깨 위에 잠시 깨끗한 한 자락의 천을 얹어 줄 뿐이다. 그러나 그 한 자락의 정돈된 천이 사람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거울 앞에서 가만히 알아차린다.
시편 19편은 후반부로 갈수록 율법과 말씀의 정결함을 노래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다윗은 하늘과 율법을 한 호흡으로 이어 노래했다. 우리에게 보내신 자연의 풍경과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실은 한 분 하나님의 두 음성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다림질이 끝난 셔츠를 보며 그 두 음성을 동시에 듣는 듯하다. 창밖의 아침과 옷장 안의 정돈, 자연과 말씀, 풍경과 본문.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고, 둘이 한자리에 놓일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평화가 깃든다.
집을 나서기 전 거실 식탁에 앉아 잠시 성경을 펼친다. 깊은 묵상이 아니어도 좋다. 한 절을 두 번 천천히 읽고, 그 문장이 마음 어느 자리에 머무는지 가만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시편 19편 14절은 그러한 아침에 가장 어울리는 기도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한 주간 거칠어진 입의 말과 어지럽혀진 마음의 묵상이, 다림질된 셔츠처럼 그분 앞에 가지런해지기를 청하는 작은 기도. 식탁 위의 머그잔에서는 옅은 김이 올라오고, 그 김의 결과 다리미의 김의 결이 어쩐지 닮아 있다. 둘 다 작고 잠깐이지만, 둘 다 사람의 어떤 자리를 부드럽게 만든다.
현관 신발장 앞에서 잠시 멈추어 셔츠의 깃을 한 번 더 매만진다. 손가락이 닿는 자리는 차갑지 않고, 다리미의 온기가 아직 옅게 남아 있다. 그 잔열은 한 주의 시작을 향해 떠나는 사람의 어깨를 살며시 데워 주는 것 같다. 사람의 품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큰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가 새벽에 정성껏 셔츠를 다린 그 손길의 흔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쩌면 셔츠를 입은 자기 자신에게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다림질은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조용한 친절이고, 그 친절은 결국 누군가에게로 흘러간다. 함께 예배할 사람들의 옆자리로, 점심을 함께 먹을 식탁의 맞은편으로, 오후에 안부를 전할 한 통의 전화 너머로.
다림질을 통해 펴지는 것은 결국 천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다. 잠언의 한 구절은 마음 지키기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서 더욱 지키라고 말한다. 마음의 자세는 거창한 결심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다리미를 잡는 손의 정성, 셔츠의 깃을 매만지는 손가락의 무게, 베란다 창문 너머로 잠시 바라본 하늘 한 자락에서 마음의 자세는 매번 새롭게 펴진다. 오월 주일 아침의 다림질은 그래서 한 주의 가장 작은 첫걸음이며, 동시에 가장 정직한 첫 기도다.
오월 주일 아침의 다림질은 그래서 단순한 가사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한 주간의 흐트러진 마음에 김을 넣고 결을 펴는 작은 의식이고, 들녘을 거닐던 다윗처럼 일상의 자리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다. 흰 셔츠가 차곡차곡 평평해지는 그 잠깐 사이, 우리는 다시 한 번 가지런해진다. 거창한 다짐도, 비장한 결심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같은 자리를 두세 번 천천히 지나가는 손길과, 그 손길에 깃든 한 줌의 정성, 그리고 다리미가 식어 가는 동안 잠시 머무는 침묵이 있을 뿐이다.
다리미를 끄고, 코드를 정리하고, 셔츠를 가만히 어깨에 걸쳐 본다. 베란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이 셔츠의 결을 한 번 더 비춘다. 그 빛은 따뜻하고, 어제와는 또 다른 결로 부드럽다. 시편의 한 구절이 그 빛 속에서 되살아난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오늘이 어제에게서 받은 기억과, 내일에게 건네줄 한 자락의 빛. 우리는 그렇게 한 주의 첫 자락을 펴며, 평범한 다리미 위에서 다시 한 번 살아간다. 흰 셔츠를 입고 현관을 나설 때, 등 뒤에서 들리는 다리미의 식어 가는 작은 소리는, 어쩌면 오늘의 가장 짧고 가장 정직한 축도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한 벌의 셔츠와 평범한 한 명의 사람을 통해, 평범하지 않은 빛이 한 주의 첫 자락 위로 다시 한 번 부드럽게 내려앉는 그런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