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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한 마리 양 — 누가복음 15장이 가르치는 하늘의 산수


너른 초원 위 한 마리 양이 풀을 뜯고 있는 평화로운 풍경

누가복음 15장은 짧은 비유 세 편을 한 자리에 묶어 놓은, 어쩌면 사복음서 안에서 가장 따뜻한 페이지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 세 비유는 모두 같은 구도를 가지고 있다. 무엇이 잃어버려졌고, 누군가가 그것을 찾기 위해 자기의 안전한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 모두가 함께 기뻐한다. 이 가운데 첫 번째인 잃은 양 비유는 가장 짧고, 동시에 가장 깊은 결을 가진다. 우리는 이 짧은 이야기를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부터 거듭 들어 왔지만, 어른이 된 다음에야 그 비유의 산수가 얼마나 비상식적인지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셈법은 이렇다. 양 백 마리를 가진 사람이 그중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닌다. 이 셈법은 지상의 합리성에 비추어 보면 분명히 어색하다. 한 마리를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안전을 잠시 미루는 것은, 시장의 관점에서는 비효율이고, 위험관리의 관점에서는 무모함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의 셈법은 시장의 산수가 아니라 하늘의 산수다. 하늘의 산수에서는, 한 마리가 결코 한 마리에 그치지 않는다. 그 한 마리는 곧 한 사람의 이름이고, 한 사람의 이야기이고, 한 사람의 평생이다.

양 떼가 머무는 산자락의 초원과 안개 낀 산

고대 팔레스타인의 목자에게 양 백 마리는 결코 작은 무리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 혼자서 키울 수 있는 평균적인 무리의 규모였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백 마리의 양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한 가족의 생계, 한 마을과의 관계,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노동의 결정체이기도 했다. 그런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사라졌을 때, 목자는 사라진 한 마리의 시장 가격이 아니라, 그 양 한 마리가 자신의 손길 아래에서 자라 온 시간의 무게를 떠올렸을 것이다. 어느 봄에 태어났는지, 어떤 풀밭에서 잘 먹었는지, 어떤 밤에 다른 양들과 어울려 잠이 들었는지. 이 비유 속의 목자가 아흔아홉을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떠나는 것은 그래서 결코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한 마리의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 누가복음 15:4-6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자리는 평범한 마당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15장의 첫 두 절은 이 비유의 무대가 어떤 자리인지 분명히 밝혀 둔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했다. 비유는 그 수군거림을 향한 답이다. 하늘은 누구를 한 마리로 셈하는가, 그리고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누가 자기 자리를 떠나는가. 이 질문이 잃은 양 비유의 가장 깊은 자리에 놓여 있다.

이 비유에서 가장 자주 간과되는 단어는 사실 한 마리도 아니고 아흔아홉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어깨라는 단어다. 잃은 양을 찾아낸 목자는 그것을 끌고 오지 않는다. 채찍으로 몰아오지도 않는다. 어깨에 메고 온다. 양은 가벼운 짐승이 아니다. 한참을 헤매다 발견된 양은 더 지치고 더 무거워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목자는 그 무게를 자기 어깨에 얹는다. 책망이 아니라 무게의 형식으로, 분노가 아니라 정성스러운 동행의 형식으로.

석양빛이 들판 끝까지 닿는 황금빛 들녘

이 비유 속의 들녘은 결코 친절한 환경이 아니다. 갈릴리 지역의 산자락은 작은 골짜기가 많고, 풀밭의 끝에는 사람의 발이 잘 닿지 않는 비탈이 곧장 떨어져 있다. 잃은 한 마리는 단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칫하면 그 비탈 어디에선가 무릎을 다치고 일어서지 못한 채 어둠을 맞이할 수도 있는 형편에 놓인다. 그러므로 목자가 한 마리를 찾아 떠난다는 행위는 한가로운 산책이 아니라, 자신의 발과 어깨의 안전까지 함께 거는 일이다. 비유는 이 사실을 직접 묘사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들녘을 떠올리며 이 위험을 자연스럽게 짐작했을 것이다. 비유의 무게는 늘 듣는 사람의 들녘에서 비로소 채워진다.

이 어깨의 이미지는 구약의 한 장면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백성을 향해 이렇게 노래한다. 여호와는 너희를 독수리 날개로 업어 자기에게로 인도하셨다고. 신명기는 또 다른 결로 같은 이미지를 들려준다.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사람이 자기 자식을 안음 같이 안으셨다고. 잃은 양 비유의 어깨는 그러므로 단순히 한 마리 양을 위한 어깨가 아니라, 출애굽 이래 그분이 자기 백성을 위해 늘 비워 두신 어깨다. 그 어깨에 한 사람의 이름이 얹힐 때, 비유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모든 세대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비유는 또한 발견 이후의 풍경을 자세히 그린다. 목자는 양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 일을 끝내지 않는다. 그는 집에 돌아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기뻐한다. 잃은 양의 발견은 한 사람의 만족이 아니라 한 마을의 잔치가 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은 결코 한 사람의 비밀스러운 성공담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을 둘러싼 공동체가 함께 누리는 잔치라는 것을 비유는 분명히 한다. 누군가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돌아옴은 곧 우리 모두의 잔치다. 우리가 누군가의 회복 소식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기뻐할 줄 모른다면, 비유의 결말은 아직 우리에게 도착하지 못한 셈이다.

그래서 잃은 양 비유는 단순히 길을 잃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를 자기 어깨 위에 얹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분의 이야기다. 어깨 위에 얹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 무게는 메는 사람을 짓누르지 않고, 메이는 사람을 다시 일으킨다. 어쩌면 신앙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설명되는 자리는 강단이 아니라 바로 이 어깨다. 누군가의 한 시간을 자기의 한 시간 위에 얹어 함께 걷는 자리, 누군가의 무거움을 자기의 어깨로 잠시 나누어 지는 자리. 비유의 어깨는 그러므로 한 사람의 신앙이 자라나는 가장 작고도 가장 단단한 학교다.

예수의 결론은 더 깊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고. 이 문장은 종종 의인 아흔아홉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듯이 오해된다. 그러나 비유의 맥락에서 이 결론은 그저 회개의 자리에 임하는 하늘의 기쁨이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말할 뿐이다. 의인의 자리도 귀하다. 그러나 잃었다가 다시 발견된 한 사람의 이야기 위에 쏟아지는 하늘의 기쁨은, 언제나 한 마을의 잔치를 일으킬 만큼 진하다. 하늘은 셈법이 가난한 곳이 아니라, 셈법이 후하고 진한 자리다.

비유의 마지막 풍경은 또한 가정의 맥락에서 다시 음미해 볼 만하다. 잔치는 본문에서 분명히 벗과 이웃을 부르는 자리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가정에서, 이 잔치는 종종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의 회복 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다. 오랫동안 마음이 멀어졌던 형제의 안부 전화 한 통,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본문을 펼쳐 든 가족의 한 페이지, 늘 같은 자리만 맴돌던 이가 새로 시작한 작은 결심. 이 모든 작은 회복이 모이면 한 가정 안에서 작은 잔치가 자라난다. 한 마리의 양이 다시 무리에 합쳐지는 일은 한 사람만의 사건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매일 지켜 봐 온 가까운 자리들의 사건이기도 하다.

이 비유는 마지막까지 우리 자신의 자리를 묻는다. 우리는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한 마리의 자리인가, 아흔아홉 가운데 하나의 자리인가, 아니면 잔치에 초대된 벗과 이웃의 자리인가. 어느 자리에 서 있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가복음 15장은 한 마리를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분의 이야기이고, 그 발걸음은 지금도 누군가를 향해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발걸음의 향수를 안고 사는 한, 우리도 누군가의 한 마리를 향해 잠시 자기 자리를 떠나는 일이 점점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잃은 양 비유의 산수는 그렇게 한 사람에게서 다음 한 사람에게로 조용히 옮아간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산수가 지상에서 자라나는 방식이다. 한 마리에서 시작된 셈이 마침내 한 마을의 잔치로 흘러가는 그 길 위에, 우리 모두의 자리도 함께 놓여 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잔치는 우리에게서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 이 비유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건네는 부드러운 권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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