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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첫날 월요일 새벽 책상 위 빈 잔에 천천히 차오르는 보리차 김 한 줄 —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 아침마다 새로운 자비를 다시 마주한 데일리QT


유월 첫날 월요일 새벽, 도시의 가로등이 아직 꺼지지 않은 다섯 시 십칠 분. 거실 마룻바닥 위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빛의 결을 따라 천천히 책상 앞에 앉는다. 어제 늦게 닫아 놓은 성경의 가죽 표지 위에 흰 가루처럼 내려앉은 새벽의 차가운 공기. 그 위에 손을 한 번 얹고, 잠시 손바닥 안쪽으로 전해 오는 미지근한 결을 가만히 느낀다. 새 달의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은 그렇게 잠시 멈춘다. 무엇을 시작하기 전의 그 짧은 공백, 그 안에서 비로소 다시 들리는 작은 음성이 있다.

유월 첫날 새벽 책상 위 보리차 김 한 줄

식탁 위 빈 도자기 컵을 들어 따뜻한 보리차를 절반쯤 채운다. 어제 끓여 놓고 가스 불을 끈 보리차는 밤새 식어 차가워졌고, 다시 작은 주전자에 옮겨 데우는 동안 부엌 창 너머로 흐릿한 새벽빛이 점점 짙은 푸른빛으로 바뀌어 간다. 잔이 다시 손바닥에 돌아오자, 김 한 줄이 천천히 위로 곧게 피어오른다. 그 김의 결을 한참 들여다본다. 잔 안쪽에서 위로, 가볍게 휘어졌다가 다시 곧게 펴지면서 사라지는 그 작은 흐름. 새 달의 첫 새벽, 가장 먼저 마주한 풍경이 이렇게 단순하다는 사실이 어쩐지 위로처럼 느껴진다.

오월 한 달은 길었다. 가족의 작은 병원 일정이 두 번 끼어 있었고, 직장에서는 분기 마감과 새 프로젝트가 겹쳐 어깨가 무거웠던 날들이 많았다. 늦은 밤 침대에 누워서도 결재가 마무리되지 않은 문서들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떠올랐고, 그 위로 또 다음 날 아침의 회의가 겹쳐 보였다. 그래서일까. 유월의 첫 페이지를 펴기 전, 가장 먼저 마음에 떠오른 본문은 어김없이 예레미야애가 3장의 그 한 줄이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

아침마다 새롭다. 본문은 그 한 줄을 우리에게 거의 매일 다시 들려준다. 어제의 인자가 오늘 아침에도 다시 새롭게 부어진다는 그 약속.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것을 매일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사실 우리의 새벽은 너무 자주 어제의 피로를 그대로 끌고 들어오고, 어제의 미해결을 그대로 머리맡에 끌어다 놓는다. 그러다 보니 새 아침의 공기조차 잠시 잠깐 어제의 한숨에 가려진 채 그대로 흘러간다.

예레미야애가의 본문이 강력한 까닭은 그것이 풍요와 안정의 한복판에서 흘러나온 고백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성이 무너지고, 성벽이 갈라지고, 백성이 흩어지는 그 한가운데에서, 가장 깊은 어둠을 통과하던 사람의 입술이 부르짖었던 노래가 바로 이 본문이다. 절망의 가장 깊은 지점에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다시 붙든다. 여호와의 인자, 그분의 긍휼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사실. 두 가지 진실이 마치 어두운 방 안에 가만히 켜진 작은 등불처럼, 그의 새벽을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잔을 다시 손바닥 안에 감싸 쥔다. 보리차의 따뜻함이 손바닥 가운데로 천천히 번지는 동안, 어제의 무거움이 마치 김처럼 천천히 사라지는 것 같다. 잔 안에서 위로 피어오르는 김 한 줄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김은 절대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무거운 것 같지만 결국 위로 향한다. 새 아침의 자비도 어쩌면 그렇게 위로 향하는 것일지 모른다. 어제의 무거움을 더 무겁게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로 한 줄의 김처럼 가볍게 피어오르며 우리의 시선을 다시 위로 들어 올린다.

펼쳐진 성경 위 새벽 빛 한 결

본문을 다시 천천히 한 줄씩 읽어 본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이 한 줄이 오늘 아침의 핵심이다. 본문은 우리의 노력이 새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결심이 새롭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새것은 여호와의 인자이며, 새것은 그분의 긍휼이다. 아침마다 새롭게 시작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마음이다. 그래서 새벽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그분의 부음을 받는 시간이며, 새 달의 첫 페이지는 우리가 무엇을 새롭게 다짐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분께서 다시 새롭게 부어 주시는 인자를 받아 마시는 자리다.

유월의 첫 페이지를 두고 어떤 거창한 계획을 다시 적지 않기로 한다. 작년 일월에도, 지난 사월에도, 그렇게 칸칸이 적어 두었던 항목들의 절반은 끝내 줄을 긋지 못한 채 한 해를 넘겼다. 대신 오늘 새벽은 한 줄만 적기로 한다. 오늘 아침, 다시 새로운 자비. 그 한 줄을 데일리QT 노트의 첫 줄에 천천히 적어 넣는다. 손글씨의 결이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둥글다. 무엇을 더 잘 해 보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다시 받아 마시겠다는 마음으로.

잔을 천천히 비운다. 보리차의 마지막 한 모금이 식도를 따라 가만히 내려가는 동안, 창 밖의 새벽빛이 어느새 옅은 연주황빛으로 바뀌어 있다. 어제까지 닫혀 있던 한 달의 문을 가만히 잠그고, 유월이라는 새 문 앞에 잠시 멈춘다. 이 문을 여는 것은 나의 손이 아니라, 어쩌면 본문이 일러 주는 그 인자의 손이다. 우리는 다만 그 손의 결을 따라 한 발 들여놓을 뿐이다. 새 아침의 자비가 어디로 우리를 데려갈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러나 무궁한 그분의 긍휼 안에서 결코 진멸되지 않으리라는 약속 하나만을 붙들고서.

새 달의 첫 데일리QT를 닫기 전, 잠깐 다른 본문 하나를 더 곁들여 떠올린다. 시편 30편 5절의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는 한 줄. 오월 한 달 동안 우리의 저녁마다 작게 깃들어 있던 울음의 결들,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한 채 베개 위로만 흘러내렸던 그 작은 한숨들. 본문은 그것이 결국 그대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녁의 울음 위에 새 아침의 기쁨이 그분의 손으로 천천히 덧대어진다는 그 약속. 예레미야애가의 자비와 시편의 기쁨은 사실 같은 새벽 안에서 만난다. 둘 다 우리가 아니라 그분께서 부어 주시는 것이며, 둘 다 아침이라는 시간 안에서 다시 새것이 되기 때문이다.

잔 옆에 놓아 둔 작은 노트의 두 번째 줄을 다시 펴 본다. 거기에는 오월 마지막 날 적어 둔 한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은 너무 무겁다, 내일은 모르겠다. 그 솔직한 한 줄을 손으로 가만히 짚으며, 그 옆 빈자리에 유월의 첫 줄을 다시 잇대어 적는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는 내일도 아침마다 새롭다. 두 문장이 한 페이지 위에 나란히 놓이자, 어제의 무거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위로 한 줄의 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앉는다. 모든 것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빛이 아니라, 그저 무거움 옆에 가만히 함께 앉아 주는 빛. 본문이 우리에게 늘 그렇게 임한다는 사실을 새 달의 첫 새벽에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오늘의 데일리QT 마지막 줄에 다시 한 번 적는다. 아침마다 새로운 자비, 오늘 아침에도 다시. 이 한 줄로 유월의 첫 페이지를 닫는다. 이제 책상의 등을 끄고, 잠시 후 깨어날 가족의 발걸음 소리를 기다리며, 그분의 인자가 부엌 식탁 위로, 아이의 가방 위로, 그리고 오늘 하루의 모든 마디 마디 위로 조용히 부어지기를 가만히 기도한다. 새 아침의 자비, 그 한 줄의 약속만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하루가, 어쩌면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정직한 신앙의 자리일지 모른다. 본문은 오늘도 짧고 단정하다. 그러나 그 한 줄은 새 달의 모든 새벽을 충분히 견인할 만큼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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