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 볕이 가장 무거운 시간입니다. 걷다가 마침 오래된 은행나무 하나가 만들어놓은 그늘 아래로 들어섰습니다. 잎사귀가 촘촘하게 겹친 자리, 그 밑에 서니 무릎 위쯤까지 살짝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습니다. 그늘 한 조각이 이렇게 고마울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가방에서 성경을 꺼내 한 편만 읽었습니다. 오늘의 QT는 짧습니다. 시편 121편 한 편, 그늘 한 조각. 그 정도면 충분한 오후입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 시편 121:5-6
지키신다는 말의 크기
시편 121편은 짧지만 ‘지키다(שָׁמַר, 샤마르)’라는 단어가 여섯 번 반복됩니다. 오르내리는 나그네를 위한 시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가, 산길을 앞에 두고 부르던 노래.
그 노래 한복판에 하나님이 “네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막 나그네에게 오른편의 그늘은 생명입니다. 강한 볕이 오른쪽 어깨를 태우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 자리를 대신 서 주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오후 은행나무 아래에서 그 그림이 조금 실감이 났습니다. 그늘은 뒤에서 오지 않습니다. 나와 태양 사이에 서 주는 것이 그늘입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 그 사이의 하루
이 시편은 낮과 밤을 함께 언급합니다. 낮의 해도 나를 상하게 하지 않고, 밤의 달도 나를 해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낮의 위험만 있는 게 아닙니다. 밤의 위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뜨거움만이 아니라, 밤에 조용히 다가오는 서늘한 것들도 있습니다. 걱정, 후회, 뒤척임. 그 모든 시간 사이에서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말합니다.
그늘이 되어주는 하나님이 밤에는 뭐가 되실까 잠깐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불이 되어 주시겠지요. 오늘 오후에는 그늘이었다가, 밤에는 이불이 되는 하나님. 어색한 상상이지만 이 시편은 그 정도로 세심한 하나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 시의 짧은 기도
그늘 아래에서 짧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오늘 오후를 감사합니다. 낮의 해가 저를 태우지 않도록 오른편에 서 주신 그늘, 감사합니다. 걸어야 할 길이 아직 남았지만, 잠깐 여기 앉아 숨을 고르는 이 시간도 순례의 한 조각으로 받아 주십시오. 다시 걸을 힘을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밤에도 저를 지켜 주십시오.
다시 걸을 힘
다시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늘 밖으로 나오자 볕이 다시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몇 걸음쯤은 견딜만 했습니다. 잠시 앉아 있던 그늘의 서늘함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QT는 그런 것 같습니다. 종일 그늘 안에 머물 수는 없지만, 잠깐 시원해진 그 감각이 남은 오후를 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