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늦은 밤까지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하다가, 결국 알람을 듣지 못한 채 깨어났다. 베란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첫차 엔진 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떴다. 시계는 다섯 시 사십칠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을 때, 골목 끝 정류장에는 가로등 하나가 외롭게 켜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누가 두고 간 듯한 빈 의자가 보였고, 의자 옆에는 첫차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새벽의 공기는 차고 푸르렀다. 어쩐지 오늘은 그 가로등 아래로 내려가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옷을 대충 걸치고 정류장으로 내려갔다. 의자에 앉자 가로등의 노란 빛이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인 듯 멀찍이 떨어져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류장 표지판에는 첫차 도착 시각이 다섯 시 오십팔 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십 분 남짓 남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문득,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한 구절이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올랐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시편 5편 3절

다윗은 새벽이라는 시간을 특별하게 여겼다. 그가 시편 다섯 편에서 노래한 아침은 단순히 하루의 시작점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은 자리, 그래서 자기 음성을 가장 정직하게 들을 수 있는 자리이다. 다윗은 그 자리를 기도의 자리로 삼았다. 아침에 주께서 들으신다는 그 한 마디는, 신학자들이 종종 지적하듯이 단지 시간의 우선순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결을 가장 먼저 누구에게 보일 것인가에 대한 결단이다.
월요일 새벽 정류장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그 결단이 얼마나 오랫동안 미뤄져 왔는지를 천천히 헤아렸다. 지난 한 달간 아침마다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것은 핸드폰이었다. 메일을 열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밤사이 올라온 뉴스 알림을 빠르게 훑었다. 그 짧은 십 분이 하루의 결을 정해 버린다는 사실을,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해 왔다. 새벽 정류장의 가로등 아래에서 처음으로 그 작은 회피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가로등의 빛은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더 정직한 거울이 되어 주었다.
첫차가 도착하는 동안 두 사람은 차례로 차에 올랐다. 정류장에는 다시 나 혼자가 남았다. 가로등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어둠이 옅어지는 동쪽 하늘은 보랏빛에서 푸른빛으로 천천히 옮겨 가고 있었다. 그 색의 변화 속에서 나는 두 손을 모았다. 거창한 기도가 아니었다. 다만 입술로 짧게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에 가장 먼저 당신께 말씀드리고 싶다고. 그 한 마디뿐이었다.

새벽 기도가 길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을 가지고 살아왔다. 한 시간은 채워야 진짜 기도라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강박이 결국 아침의 자리를 통째로 비워 두게 만들었다. 길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시작하지 말자는 자기 변명이 매일 새벽을 침범했다. 다윗의 시편을 다시 읽으며 깨닫게 된다. 그가 노래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아침에 주께 가장 먼저 음성을 드리는 그 한 번의 돌이킴, 그것이 하루를 떠받친다.
정류장에서 집으로 올라오는 골목길은 어느새 환해져 있었다. 골목 끝 작은 화단에서는 채송화 몇 송이가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어제 저녁 무심히 지나쳤던 그 꽃들이 새벽빛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벽이 만든 차이였다. 같은 골목, 같은 화단, 같은 꽃이었지만, 마음의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것의 깊이가 달라진다. 시편 기자가 그토록 아침을 사랑했던 이유를 그 골목 끝에서 작게 짐작해 보았다.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성경을 펼쳤다. 시편 다섯 편 한 장만 천천히 읽었다. 책을 덮고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셨다. 그 사이 해는 완전히 솟아 베란다 창문을 가득 채웠다. 길지 않은 새벽이었지만, 마음 한 켠에 작은 등잔 하나가 켜진 것 같았다. 누가 보기에는 평범한 월요일 새벽일 뿐이겠지만, 나에게는 오랫동안 비어 있던 한 자리에 다시 의자가 놓인 아침이었다.

새벽 정류장에 앉아 있던 그 짧은 시간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한 시간의 큐티 시간을 자랑처럼 이야기하지만, 다윗의 시편 다섯 편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음성의 순서에 무게를 둔다. 아침에 가장 먼저 누구에게 마음의 결을 보일 것인가. 그 질문은 한 사람의 신앙의 방향을 결정한다. 새벽 가로등 아래에서 그 질문이 새삼 단순해졌다. 핸드폰이 먼저인가, 그분이 먼저인가. 둘 사이의 거리는 십 초도 되지 않지만, 그 십 초가 하루의 결을 만든다.
아침 햇살이 식탁 위에 닿을 무렵, 둘째 아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나왔다. 평소 같으면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부터 확인했을 텐데, 오늘은 아이의 부스스한 머리부터 천천히 쓰다듬어 줄 수 있었다. 새벽에 한 차례 마음의 순서를 바꿔 두니, 아침의 가장 먼저 자리에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생겼다. 시편 다섯 편의 그 한 줄은 결국 우리를 그분께만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다시 보게 만든다. 아침의 자리가 정돈되면 그 뒤의 모든 자리도 조금씩 다시 정돈된다.
오늘 하루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회의가 길어질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전화 한 통이 마음을 흔들 수도 있다. 그러나 아침에 가장 먼저 그분께 음성을 드린 사람은, 하루의 첫 단추를 그분 손에 맡긴 사람과 같다. 그 한 단추가 채워져 있으면, 그 뒤에 이어지는 옷자락이 흐트러져도 다시 정돈할 수 있다. 새벽 정류장의 가로등은 그 단추를 끼우는 자리에서 켜져 있었다.
내일 새벽에도 알람을 맞춰 두려고 한다. 거창한 한 시간이 아니라, 가로등 아래에서 두 손을 모으는 십 분이면 충분할 것이다. 어쩌면 그 십 분이, 다윗이 시편 다섯 편에서 노래한 그 아침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첫차가 떠난 뒤 가로등이 꺼지기 전, 동쪽 하늘이 푸른빛에서 흰빛으로 옮겨 가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음성이 가장 먼저 그분께 닿기를 바라며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