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사월 끝의 책상 위에서 — 말씀이 머무는 자리


사월의 끝자락, 책상 위에는 펼쳐진 성경 한 권과 식어가는 차 한 잔이 놓여 있다. 창문 너머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빛이 종이 위에 길게 누워 글자들을 따라 흐른다. 그 빛은 서두르지 않는다. 한 줄을 비추고, 잠시 머물고, 다음 줄로 옮겨간다. 이 풍경 앞에 앉을 때마다 마음이 한 박자 느려진다. 바깥의 분주함은 잠시 문 밖으로 물러서고, 글자들 사이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시간이 시작된다. 어떤 날은 한 절에 오래 머무르고, 어떤 날은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한 단어 위에서 한참 멈춘다. 그래도 좋다.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은 본래 그렇게 흘러간다.

오래된 친구처럼 자주 펴는 한 구절이 있다. 시편 119편의 가운데, 마치 긴 노래의 후렴구처럼 다시 돌아오는 그 말씀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시편 119:105

이 짧은 한 줄을 읽을 때마다 등불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등불은 멀리까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다음 한 걸음을 보여 줄 뿐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시편 기자는 노래한다. 우리는 자주 인생의 모든 모퉁이를 미리 알고 싶어 한다. 다음 달의 일과 내년의 일과 십 년 뒤의 풍경을 한꺼번에 환히 비추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말씀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말씀은 다음 한 걸음을 위한 빛이다. 사월의 마지막 책상 앞에서 다시 깨닫는 것은 이 단순하면서도 단단한 사실이다. 등불은 발치를 비추고, 시야는 한 보 앞까지 열려 있으며, 그다음 한 보는 다시 한번 펴 든 말씀에서 열린다.

펼쳐진 성경과 햇빛

그러므로 강해라는 말은 본래 무거운 학문의 자리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강해는 한 구절을 천천히 펴서 들여다보는 일, 그 구절이 오늘의 나에게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묻는 일이다. 시편 119편 전체가 길고 긴 강해이며, 동시에 길고 긴 기도이다. 시인은 율법과 법도와 증거와 명령과 말씀이라는 다양한 이름으로 같은 한 분의 음성을 부른다. 한 단어로 다 담을 수 없는 풍성함이 거기 있다. 한 단어로 다 담을 수 없기에, 매일 다른 결로 다가오는 음성을 우리는 다시 만난다. 어제는 위로로 들렸던 구절이 오늘은 도전으로 들리고, 내일은 다시 약속처럼 들릴 것이다. 같은 강이 같은 자리를 두 번 흐르지 않듯이, 같은 말씀도 같은 마음에 두 번 같은 모양으로 닿지 않는다.

시편 119편의 시인은 율법을 사랑한다고 거듭 고백한다. 그 사랑의 형태는 화려하지 않다. 새벽에 일어나 묵상하고, 밤중에도 마음 가운데 떠올린다. 환난 가운데 위로를 얻고, 부유함보다 그것을 더 귀히 여긴다. 한마디로 말씀이 그의 일상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다. 사랑이라는 말은 자주 감정의 색을 띠지만, 시인의 사랑은 감정 이전에 자리이다. 무엇이 내 하루의 중심에 놓여 있는가, 무엇이 내 결정을 다듬는가, 무엇이 내가 두려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것의 자리이다. 사랑은 결국 시간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이고,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이며, 마음의 무게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이다.

등불이라는 비유 앞에서, 또 하나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옛 시골 마을의 등잔불은 사람이 다가가는 만큼 자기 자리를 비춰 주었다. 멀리서 보면 작은 점에 지나지 않지만, 그 곁에 앉으면 책의 글자 한 줄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빛이 되어 주었다. 말씀도 그렇다. 멀찍이서 바라보면 두꺼운 책 한 권일 뿐이다. 그러나 그 곁에 앉아, 한 구절을 가만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그 한 구절은 오늘의 발걸음 한 칸을 환하게 비춰 준다. 어떤 날은 위로의 빛이 되고, 어떤 날은 멈춰 서서 돌이키게 하는 빛이 되며, 또 어떤 날은 다음 한 발을 내딛게 하는 작은 용기가 된다. 등불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우리가 곁에 앉을 때 비로소 빛이 우리에게로 온다.

조용한 책상과 책

그래서 말씀의 강해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작은 자리에서 시작된다. 식탁 모서리에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잠들기 전 침대 머리맡에서. 한 절을 읽고 그 절을 한 번 더 읽는다. 어떤 단어 위에 마음이 머무는지를 본다. 그 단어가 오늘의 나에게 무엇을 묻는지 듣는다. 답이 곧장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등불은 다음 한 걸음을 위한 것이지, 모든 길을 한꺼번에 보여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묵상은 하루를 다 지나서야 비로소 의미가 떠오르고, 어떤 구절은 몇 달이 흘러서야 마음의 어떤 자리에 도착한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익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견디는 것도 묵상의 일부이다.

또 하나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다. 시편 119:105의 등불은 발에, 빛은 길에 비유된다. 발에 비치는 등불은 가깝고 작다. 길에 비치는 빛은 조금 더 멀리, 그러나 여전히 이 길 위에만 머문다. 말씀은 다른 사람의 길을 비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길을 비추기 위해서 켜진다. 그래서 묵상은 늘 자기 자신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 누군가를 정죄하기 위한 빛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묻는 빛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잊을 때마다 말씀은 무기가 되고, 기억할 때마다 말씀은 등불로 돌아온다.

사월이 끝나간다. 새해의 결심은 이미 흐릿해졌고, 봄의 설렘도 일상의 색으로 바랬다. 그 모든 빛바램 가운데 한 가지만은 변하지 않는다. 책상 위의 그 책은 여전히 펴면 펴진다. 손을 대면 글자들이 살아 일어선다. 시인이 노래한 그대로, 발 앞을 비추는 등불은 오늘 저녁에도 켜진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그 곁에 앉는 것, 한 절을 천천히 읽고 또 한 번 읽는 것이다. 그 작은 반복 가운데 말씀이 우리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어느 날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걸음걸이를 바꾸어 놓는다.

책장을 덮으며 짧게 기도한다. 멀리까지 보여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음 한 걸음을 보여 주십시오. 그 걸음을 떼고 나면, 또 한 걸음의 빛이 켜질 것을 믿습니다. 사월의 마지막 햇살이 책상에서 천천히 물러난다. 등불은 어느새 마음 안쪽에 옮겨 앉아, 저녁의 길을 비추기 시작한다. 강해라는 말이 무겁게 들렸던 시절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 말이 따뜻하게 들린다. 펴고, 읽고, 머물고, 다시 펴는 일. 결국 그것이 강해이고, 그것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