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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첫 월요일 오전 시편 23편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에 다시 손을 얹은 한 시간 —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한 줄의 강해


유월의 첫 월요일 오전 열 시 사십 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시편 23편을 천천히 펴 든다. 누구나 한 번쯤은 외우다시피 한 본문이고, 새벽기도회와 결혼식과 장례식의 가장 깊은 자리마다 자주 낭독되는 본문이라,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너무 익숙해서 자주 흘려 듣게 되는 본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강해라는 작업은 익숙함을 다시 한번 낯설게 만들어, 마치 처음 펴 보는 것처럼 한 절 한 절을 다시 손으로 짚어 보게 만드는 일이다. 오늘 오전, 1절부터 3절까지의 세 절을 한 시간 동안 다시 천천히 들여다본다.

푸른 풀밭 위로 흘러가는 햇살의 결

본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단호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다윗은 형용사를 잘 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한 사실을 그대로 내놓는다. 여호와가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 결과로 내가 어떤 상태에 놓이는지. 두 줄 사이에 군더더기가 없다. 그러나 이 단순한 두 줄 안에 신앙고백의 가장 깊은 핵심이 들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라는 첫 줄은 관계의 선언이고,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둘째 줄은 그 관계의 결과로 흘러나오는 상태의 선언이다. 강해의 첫 번째 작업은 이 두 줄을 떼어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 있는 작은 화살표를 다시 그려 보는 일이다. 목자가 그분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 부족함이 없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목자가 그분이라는 사실이 먼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본문 앞에서 종종 본의 아니게 1절의 어순을 뒤집어 읽는다. 부족함이 없는지 먼저 확인해 본 다음, 부족함이 없을 때에만 그분을 목자로 인정하려는 마음. 그러나 다윗의 어순은 정반대다. 그가 양 떼를 먹이던 광야의 풀이 늘 풍성했기 때문에 그분을 목자로 부른 것이 아니다.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동굴에 숨던 밤에도,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들었던 새벽에도, 그는 여전히 같은 어순을 유지했다. 목자가 먼저이고, 부족함의 평가는 그 다음이다. 1절을 강해할 때 가장 먼저 짚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어순의 신학이다.

2절로 넘어간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본문은 갑자기 두 가지 풍경을 한 줄에 나란히 놓는다.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 목축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가지는 양 떼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다. 양은 풀을 먹어야 살고, 물을 마셔야 산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히 양 떼의 식사와 음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두 동사에 주목해야 한다. 누이시며와 인도하시는도다. 양은 스스로 풀밭에 눕지 않는다. 양은 두려움이 풀리지 않으면 결코 다리를 접고 눕지 않는 동물이다. 들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사방의 위협이 잠잠해질 때, 그제야 양은 비로소 다리를 접는다. 따라서 누이시며라는 동사는 단순히 풀밭을 제공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이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그 환경을 안전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의미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시편 23편 1-3절

또 하나의 동사는 인도하시는도다이다. 양은 물의 흐름이 거센 곳에서는 마시지 않는다. 콧잔등이 물 표면에 닿아 호흡이 흐트러질까 봐, 양은 본능적으로 거센 물에서 등을 돌린다. 그래서 목자는 거센 물줄기를 막아 작은 웅덩이를 만들거나, 흐름이 잔잔한 지점을 일부러 찾아 양을 그곳까지 데려간다. 쉴 만한 물 가라는 표현은 그저 풍요로운 수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본성을 헤아려 그가 안심하고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흐름까지 다듬어 주신 목자의 손길을 담고 있다. 강해의 두 번째 핵심이 여기에서 흘러나온다. 목자는 풍요를 제공하시는 분이라기보다, 양이 그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환경 자체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

잔잔한 물가 호수 위 작은 파문

3절은 두 절의 풍경을 받아 한층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1절과 2절이 양의 몸을 다루는 풍경이었다면, 3절은 양의 영혼을 다루는 풍경이다. 소생시키시고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shuv의 사역형으로, 직역하면 돌이키게 하시다, 되돌리시다라는 의미를 품는다. 길을 잃고 헤매던 영혼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려 놓으신다는 의미다. 양 떼의 일상 속에서 가장 무서운 위협은 들개나 절벽보다 사실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한 마리의 양이 한 번 무리에서 떨어지면, 그는 곧 방향을 잃고 점점 더 외진 골짜기로 들어간다. 그때 목자가 그를 다시 데려와 무리 한가운데에 세워 두는 그 동작, 그것이 바로 소생시키시고라는 한 단어가 함축하는 풍경이다.

그리고 본문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덧붙인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유가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사실. 이 한 구절이 시편 23편 전체의 무게중심을 한 번에 뒤바꾼다. 우리가 인도받는 모든 길의 궁극적 목적은 결국 우리가 아니라 그분의 영광이라는 사실. 우리가 푸른 풀밭에 누이는 것은 우리의 안식이 가장 큰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인도받은 우리가 다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강해의 세 번째 핵심이 여기에 있다. 목자의 인도하심은 양의 안전과 풍요와 회복을 모두 포함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그분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는 신학적 방향성을 결코 잃지 않는다.

그리고 본문이 들려주는 그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구절은, 강해를 듣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거울을 다시 들이댄다. 우리가 신앙의 길에서 자주 흔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인도하심의 방향을 우리의 행복으로 한정하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풀밭과 잔잔한 물가의 풍경을 떠올릴 때, 우리는 너무 자주 그 풍경의 중심을 내가 안전한 모습으로 그려 놓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 안에 그분을 끼워 넣으려 한다. 그러나 본문의 그림은 정반대다. 풍경의 중심에는 양이 아니라 목자가 있고, 목자의 손길이 향하는 방향에는 양의 안전과 더불어 늘 자기 이름의 영광이 함께 들어 있다. 1절부터 3절까지 본문의 동선은 결코 양의 행복을 끝점으로 삼지 않는다. 양의 회복과 인도가 마침내 닿는 자리는 그분의 이름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안식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분의 영광을 함께 부르며 살게 된다.

한 시간의 강해를 닫으며 다시 책상 위 노트에 세 줄로 핵심을 정리한다. 첫 줄,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그분이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줄, 풍요는 환경 자체를 다듬으시는 목자의 손길 안에서 비로소 누려진다. 셋째 줄, 모든 인도하심의 궁극적 방향은 그분의 이름을 위함이다. 익숙한 본문이 다시 낯설어지는 자리, 그래서 다시 새 것처럼 마주하게 되는 자리. 강해라는 이름의 그 좁고 긴 시간이 유월의 첫 월요일 오전을 가만히 잡아 준다. 오후의 일정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기 전, 본문이 일러 준 세 줄을 마음의 가장 안쪽 자리에 한 번 더 새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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