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끝자락의 햇살이 화단 모퉁이까지 길게 내려온다. 매일 출퇴근길 옆을 무심히 지나치던 그 작은 화단이다. 사월에 핀 튤립들은 진작에 자리를 비웠다. 오월 초의 장미들도 한 차례 무성한 시간을 보내고 시들어 갔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름조차 모르는 작고 흰 꽃 한 송이. 어제 비가 한 차례 짧게 지나간 자리에 그 꽃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섰다. 마태복음 육장이 마음에서 다시 펼쳐졌다.
이 본문은 너무 자주 인용된 본문이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는 한 마디. 그러나 너무 자주 인용되었기에 오히려 본문의 무게가 일상에서 가벼워진 면이 있다. 오늘 강해의 시간에 한 절씩 천천히 다시 읽어 본다. 산상수훈의 육장은 단순한 위로의 본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염려 구조 전체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질문이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6장 28-29절
예수님께서 이 한 구절을 말씀하셨을 때, 그분의 시선은 어디를 향했을까. 갈릴리 호숫가의 풀밭, 그 풀밭 가운데에 피어 있던 이름 모를 야생화 한 송이. 그 작은 꽃은 누구의 손에 의해 심어진 것이 아니다. 누구의 거름과 가지치기를 거친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 자기 자리로 피었고, 시간이 되면 시들어 자기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꽃 한 송이의 색과 결, 그 꽃잎의 디자인 안에는 솔로몬의 모든 보석상자가 흉내 낼 수 없는 어떤 정밀함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강해의 첫 번째 층위는 바로 이것이다.
들의 백합화는 그 자체로 의미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리에 핀다. 그 핀다는 행위 안에 이미 창조주의 디자인이 흘러들어 있다. 우리의 노동도, 우리의 사역도, 우리의 가정 운영도 그 결을 따라야 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신다. 의미는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 내야 할 산출물이 아니다. 의미는 이미 우리 안에 심어져 있고, 우리는 그 심긴 자리에서 피어나는 자일 뿐이다.

두 번째 층위는 염려에 대한 진단이다.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 이야기 직전에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가 미래의 식탁과 미래의 옷장과 미래의 통장 잔고를 위해 오늘의 평안을 끊임없이 저당 잡힐 때, 우리는 들의 백합화의 비유에서 완전히 떠난 자가 된다. 들의 백합화는 내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늘 자기 색을 가장 진하게 피워 낸다. 산상수훈 육장은 미래 계획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무게에 짓눌려 오늘의 색을 잃지 말라는 사랑의 권면이다.
세 번째 층위는 비교의 자리이다. 본문은 솔로몬의 영광이라는 비교 대상을 의도적으로 끌어들였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영광의 정점에 솔로몬이 있다. 그러나 그 정점조차 풀밭의 야생화 한 송이의 자연스러움을 흉내 내지 못한다. 우리는 늘 누군가와 비교한다. 옆 동료의 진급 속도, 동창 자녀의 학교 성적, 친구의 부부 관계의 안정성. 그 끝없는 비교의 자리에서 우리는 솔로몬보다 큰 영광을 얻어 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닦달한다. 들의 백합화는 그 닦달 자체가 잘못된 좌표 안에 서 있음을 조용히 알려 준다.
오월 끝자락 화단의 작고 흰 꽃 한 송이 앞에서 이 강해를 마무리한다. 그 꽃은 오늘 시들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그 자리는 비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그 꽃은 자기 자리에서 가장 진한 자기 색을 피워 냈다. 산상수훈의 들의 백합화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신다. 오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 강해의 음성이 일상의 분주함 한가운데에 한 줄의 평안을 길게 그어 놓는다. 화단을 지나는 한 사람의 시선이 그 한 줄을 발견할 때, 산상수훈의 한 자락은 다시 살아나 그 사람의 하루를 따라 걸어간다.
강해의 네 번째 층위는 시간의 자리이다. 들의 백합화는 짧은 생애를 산다. 한 계절도 채 머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안에서 자기 색을 가장 진하게 피워 낸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점점 길어지는 오늘날, 우리는 시간의 길이에 대한 신화 안에 살고 있다. 더 오래 살면 더 풍성한 의미가 자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그러나 산상수훈은 정반대를 가리킨다. 의미의 깊이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시간의 결에서 자라난다. 들의 백합화 한 송이의 짧은 한 주가, 의미 없이 늘어진 백 년의 시간보다 깊다.
다섯 번째 층위는 공동체의 자리이다. 백합화는 혼자 피지 않는다. 풀밭 안에 다른 풀들과 함께 자란다. 다른 들꽃들과 같은 햇살과 같은 비를 나누어 받는다. 신앙의 자리도 그렇다. 우리는 자기 혼자의 영광을 위해 자라는 자가 아니다. 우리가 자리한 화단 전체의 결 안에서 자기 색을 피우는 자이다. 옆자리의 동료가 자기 색을 피울 수 있도록 한 번의 따뜻한 시선을 건네는 일, 후배가 자기 색을 잃지 않도록 한 번의 묵묵한 응원을 보내는 일. 그 작은 동행이 풀밭 전체의 그림을 완성한다.
강해의 마지막 적용으로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어떤 화단의 결 안에 서 있는가. 그 화단에서 내 색은 무엇인가. 그 색을 피우기 위해 나는 솔로몬의 영광을 따라가는 자인가, 아니면 그분의 손에 심긴 자리를 신뢰하는 자인가. 마태복음 육장의 들의 백합화는 그 질문을 우리 손에 한 송이의 작은 꽃으로 쥐여 준다. 그 꽃 한 송이의 무게를 오늘 하루 가만히 들고 다닌다.
화단을 떠나면서 한 번 더 그 작고 흰 꽃을 돌아본다. 오월의 햇살은 이제 화단 너머의 길까지 길게 비추고 있다. 그 햇살 안에서 작은 꽃 한 송이가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산상수훈의 한 자락이 그 흔들림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강해의 자리는 결국 본문이 우리의 일상의 한 모퉁이로 걸어 들어와 우리와 동행하는 자리이다. 오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이 그 동행의 한 자락 안에서 천천히 자기 색을 피워 간다.
한 가지 작은 묵상을 더 덧붙인다. 들의 백합화의 비유 안에는 시간의 차원과 함께 공간의 차원도 들어 있다. 들이라는 한 글자가 그 공간의 차원을 가리킨다. 들은 사람이 세심하게 가꾸는 정원이 아니다. 들은 사람의 손이 직접 닿지 않는 자리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백합화는 가장 자기 색을 진하게 피워 낸다. 신앙의 자리도 그런 면이 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 어떤 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 피어나는 한 사람의 작은 결단이 결국 가장 깊은 향을 낸다.
일상의 자리에서 우리는 늘 보이는 자리의 영광을 추구한다. 누군가가 알아주는 자리, 누군가의 평가가 따라붙는 자리, 어떤 형태의 보상이 약속된 자리. 그러나 산상수훈의 들의 백합화는 그 자리들이 우리 신앙의 본질을 결정짓지 않는다고 말한다. 본질은 들의 자리에서 결정된다. 새벽에 혼자 일어나 성경 한 절을 읽는 자리, 아무도 보지 않는 가운데 한 사람을 위해 한 줄의 기도를 적는 자리, 누구의 박수도 없는 가운데 한 줄의 옳은 결단을 내리는 자리. 그 들의 자리들이 결국 한 사람의 백합화의 색을 결정한다.
오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이 그 들의 자리의 결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화단 모퉁이의 작고 흰 꽃 한 송이가 그 결을 한 송이의 모양으로 보여 주었다. 산상수훈 육장의 본문을 다시 덮으며, 오늘 하루의 일상의 들의 자리들을 천천히 떠올린다. 새벽의 책상, 출근길의 한 자락, 점심시간의 짧은 침묵, 퇴근길의 어느 골목. 그 모든 들의 자리가 결국 한 사람의 백합화의 색을 가꾸는 자리이다. 강해의 마지막 한 줄을 마음에 적어 둔다. 들의 자리를 잃지 말라. 그곳에서 너의 색이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