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목요일 오후 세 시. 햇살이 베란다 창문 너머로 비스듬히 흘러든다. 바닥에 길게 누운 빛의 띠 위에서 작은 먼지들이 천천히 부유한다. 부엌 일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려 베란다 문을 여니, 데워진 공기와 흙 냄새, 그리고 어디선가 풍겨오는 풀 향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도시의 한낮이지만 이 작은 베란다에는 일종의 정적이 있다. 그 정적 안에 화분 몇 개가 차분히 놓여 있다.

물뿌리개를 들고 화분 앞에 선다. 한쪽 구석에 놓인 다섯 개의 화분. 가장 큰 잎을 내고 있는 몬스테라, 베란다 끝에서 햇살을 향해 잎을 펼치는 작은 호야, 지난겨울 친구가 선물해 준 율마, 그리고 흙만 보이던 자리에서 며칠 전 새순을 올린 이름 모를 다육이 두 화분. 화분마다 다른 흙, 다른 잎, 다른 속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오늘은 유난히 또렷이 보인다.
물을 부으며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제 닦지 못한 잎사귀에 옅은 먼지가 앉아 있다. 휴지를 한 장 가져와 잎 한 장 한 장을 살며시 닦는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지는 잎의 두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디테일이다. 화분 받침에 고인 물을 비우고, 흙이 마른 자리에는 물을 더 부어 준다. 이렇게 별것 아닌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 한쪽이 가지런해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 시편 1:3
시냇가에 심긴 나무. 평생 한자리에 머물지만, 그 자리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며 시절을 따라 묵묵히 열매를 맺는 나무. 어쩌면 신앙이란, 그렇게 거창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한자리에서 매일 주어지는 작은 충실함의 누적일지도 모르겠다. 떠들썩한 자리에서 외치는 결단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반복되는 들여다봄이 사람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끌어 간다.

베란다 화분 앞에서 물을 주는 일은, 처음에는 한 주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식물마다 필요한 물의 양과 빈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무심한 일정이 아니라 살펴보는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잎의 색이 옅어졌는지, 흙 표면이 어느 깊이까지 말랐는지, 새순이 올라오는 자리가 따뜻한 빛을 받고 있는지. 매일 아주 잠깐이라도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신앙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결단의 순간보다 매일의 작은 들여다봄이 더 결정적일 때가 많다. 하루를 시작하며 잠시 멈추는 시간, 점심을 먹기 전 짧게 드리는 감사, 저녁의 묵상 한 페이지. 거창한 부흥회나 멀리 떠나는 수련회만이 영적 성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무지 흥미롭지도 않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상의 자리에서, 사람의 영혼은 가장 깊이 자란다.
물을 다 주고 나니 손가락 끝에 흙냄새가 묻어 있다. 베란다 문턱에 잠시 걸터앉아, 햇살을 받으며 호흡을 고른다. 멀리서 어린이집 아이들의 함성이 들린다. 가까이서는 옆집 베란다에서 밥솥의 김 빠지는 소리가 난다. 평범한 한낮, 평범한 동네, 평범한 한 사람의 시간. 그러나 이 평범 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 일렁이는 무언가가 있다. 아주 조용한 기쁨 같은 것. 누구에게도 자랑할 만한 사건은 아니지만, 분명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
화분 옆에는 며칠 전 새순을 올린 다육이가 있다. 한참 동안 그 자리만 들여다본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저 마른 흙으로만 보였던 자리에서 어떻게 저렇게 작은 초록이 돋아났을까. 햇살, 물, 시간. 그리고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어떤 생명의 원리. 신앙도 그렇게 자라는 것이라 믿는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작용하고,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아침 마음 한쪽에 새순이 돋아 있는 것을 발견하는 일.
오늘 베란다에서 보낸 십오 분이 어쩌면 오늘 하루 가장 거룩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보지 못한 동작, 누구도 칭찬하지 않은 수고. 그러나 그 작은 일 안에서 나는 잠시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매일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잎을 펴는 일.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살아내고 싶다는 마음이 베란다 한구석에서 조용히 자란다.
문득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마당이 떠오른다. 외할머니는 작은 채소밭을 가지고 계셨다. 새벽이면 호미를 들고 잡초를 뽑으셨고, 한낮이면 물뿌리개를 들고 한 줄 한 줄 채소들 사이를 걸어 다니셨다. 그 모습이 어린 마음에는 그리 거룩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부지런한 노인의 일상이려니 했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떠나신 뒤 한참이 지나서야, 그 새벽의 호미와 그 한낮의 물뿌리개 안에 평생 굽히지 않으신 어떤 신앙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할머니의 채소밭은 사실 외할머니의 기도방이었다.
물을 주는 일과 기도하는 일은 닮아 있다. 둘 다 즉각적인 결과를 보여 주지 않는다. 둘 다 누가 지켜보지 않는 자리에서 반복된다. 둘 다 사실은 식물 자체나 사람 자체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하시는 분 앞에 흙을 부드럽게 풀어 두는 일에 가깝다. 우리는 자라게 할 수 없다. 다만 자라게 하시는 분 앞에 매일 우리의 자리를 내어 드릴 뿐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다. 심는 사람도, 물 주는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시다.
그래서 베란다 화분 앞에 서 있는 십오 분의 시간이 사실은 가장 정직한 신앙의 시간일 수 있다. 거기에는 외칠 청중도 없고, 인정해 줄 누군가도 없다. 다만 흙과 잎과 빛과 한 사람의 손이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묵묵히 자라게 하시는 분, 늦게 새순을 올리는 다육이를 비웃지 않으시는 분, 잎사귀에 묻은 먼지를 닦는 작은 손길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 그분의 임재 앞에서 마음이 가만히 정돈된다.
마지막 화분에 물을 주고, 물뿌리개를 제자리에 둔다. 베란다 문을 닫기 전, 한 번 더 화분을 돌아본다. 잎사귀들이 햇살에 천천히 흔들린다. 작고 평범한 풍경.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손길이 오늘 하루 마음을 따스하게 데운다. 거창한 기적이 아니어도, 화분 한 줄의 풍경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배우는 오월의 오후였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반복이 어느 날 마음의 깊은 자리에 한 그루 나무를 길러 놓을 것이라 조용히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