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거실의 책상 위에는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하나는 내가 앉는 의자, 다른 하나는 비어 있는 의자다. 어떤 사람들은 그 빈 의자에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기도한다고 표현한다. 마음의 자리를 만드는 옛 신앙의 방식이다. 그 의자 옆 책상 위에는 노트북이 한 대 놓여 있고, 화면에는 깜박이는 커서 하나가 새벽의 정적을 두드리고 있다. AI 시대의 새벽 풍경이다. 깜박이는 커서와 비어 있는 의자가 한 책상 위에 함께 놓여 있다.
요즘은 묵상 보조 도구로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본문을 입력하면 짧은 강해를 만들어 주고, 기도 제목을 적으면 정돈된 기도문을 정리해 준다. 신학적인 질문에 즉각적인 응답을 하고, 원어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을 정리해 주기도 한다. 도구로서의 효용은 분명하다. 그러나 AI 전문가로서, 그리고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새벽마다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AI가 정말 우리의 묵상을 대신할 수 있는가. 더 정확하게는, 우리가 그 도구에게 무엇을 맡겨도 되고 무엇은 맡길 수 없는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마태복음 6:6
산상수훈의 이 한 절은 기도의 본질을 가장 짧고 명확하게 담는다. 기도는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닫힌 문 안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는 만남이다. 골방, 그 작은 공간이 하나님과의 일대일이 일어나는 자리다. AI는 그 자리 바깥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지만, 그 자리 안으로 대신 들어갈 수는 없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위임이 불가능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 사용하는 거대언어모델은 매우 유능하다. 본문을 분석하고, 문맥을 정리하며,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 그러나 한 가지를 하지 못한다. 그 도구는 침묵하지 못한다. 입력을 주면 반드시 출력을 만든다. 답하지 않는 것이 가장 깊은 응답인 자리에서, AI는 멈출 수 없다. 묵상의 자리는 그 멈춤의 자리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채로 한참을 앉아 있는다. 그 침묵이 곧 그분과의 가장 깊은 대화다. AI는 그 침묵에 동참할 수 없다. 그것이 그 도구의 한계이자 우리의 영역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묵상이란 정보의 정리가 아니라 임재 안에 머무는 것이다. 같은 본문을 천 번 읽어도 새로운 깨달음이 임하는 것은, 우리가 더 많은 데이터를 모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계신 분이 매번 다르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AI는 데이터를 학습하지만, 임재를 학습하지는 못한다. AI는 본문을 정리하지만, 그 본문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을 대신해 줄 수 없다. AI는 기도문을 만들지만, 새벽 다섯 시 책상 앞에 앉아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을 대신 흘려 줄 수 없다. 그 눈물이야말로 묵상의 가장 깊은 결과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AI를 어떻게 쓸 것인가. 도구로서의 분명한 자리를 정해 주어야 한다. 첫째, 본문 이해를 돕는 자료 정리에는 적극적으로 사용해도 좋다. 원어, 역사적 배경, 신학자들의 해석을 빠르게 비교해 주는 일에는 인간의 시간을 많이 절약해 준다. 둘째, 그러나 묵상의 자리에서는 도구를 잠시 닫아야 한다. 답을 묻는 자리가 아니라 답을 듣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셋째, 기도문은 도구가 만든 문장으로 시작하더라도, 마지막은 자기 자신의 언어로 마무리해야 한다. 자기 마음의 진짜 문장이 그분 앞에 드려져야 한다. 도구는 골방의 문 밖까지만 함께 따라온다. 골방 문턱에서 도구는 기다려야 하고, 우리만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성경적 청지기 정신은 도구를 활용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지만, 도구가 자리를 차지하지 않게 하라고도 가르친다.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위임받은 것을 잘 활용하는 데 있지만, 그 위임의 출처가 누구인가를 잊지 않는 것에도 있다. AI는 우리의 종이지 주인이 아니다. 새벽 다섯 시의 책상 위에서 그 위치를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어느 날 우리는 비어 있는 의자가 아니라 깜박이는 커서 앞에 우리의 자기 자신을 내어 주게 된다. 기술은 빠르고 신앙은 느리다. 그 속도의 간극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빠른 답을 얻고 깊은 만남을 잃는다.
새벽의 빈 의자를 다시 본다. 그 의자는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자의 침묵 안에서 매일 한 인격이 만나진다. 화면의 커서는 깜박이지만, 그 깜박임은 어떤 임재도 만들지 않는다. 두 자리가 한 책상 위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일 선택의 자리를 준다. 어디로 먼저 시선을 두고 하루를 시작할 것인가. 어느 자리가 나의 진짜 골방인가. 마태복음 6장이 묻는 질문은 이천 년이 지난 새벽의 책상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들어가라, 닫으라, 은밀한 중에 계신 분 앞에 앉으라. 그분이 갚으신다.
AI 시대의 묵상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그 묵상은 도구를 끄고 시작되어야 한다. 화면의 불빛을 잠시 줄이고, 새벽의 자연광에 자기 자신을 맡기는 시간이 먼저 와야 한다. 그 자리에서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도구의 효율로 옮겨 적는 일은 뒤따라 와도 좋다. 순서가 중요하다. 만남이 먼저, 정리는 나중. 임재가 먼저, 효율은 나중. 우리의 신앙이 도구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이 순서를 매일 의식적으로 회복해야 한다. 새벽의 빈 의자가 깜박이는 커서보다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한다. 오늘 당신의 책상 위에서도, 그 순서가 지켜지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작은 제안을 덧붙인다. 매일 새벽 책상 앞에 앉기 전, 노트북의 화면을 잠시 덮어 두는 작은 동작 하나를 권하고 싶다. 그 짧은 동작이 골방의 문을 닫는 행위와 닮아 있다. 화면을 닫으면 비로소 빈 의자가 보이고, 빈 의자가 보이면 비로소 그분의 자리가 다시 환히 드러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그 작은 동작을 더 자주 의식해야 한다. AI는 우리의 묵상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AI 시대의 우리에게, 묵상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은 결단이 되어 가고 있다. 그 결단을 매일 새벽 한 번씩 다시 내려야 한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가 오늘 새벽의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새벽의 책상 위, 노트북 화면을 잠시 끄고 빈 의자를 한 번 더 바라본다. 의자는 여전히 비어 있지만, 그 비어 있음 자체가 어떤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은 더 또렷이 보인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 자리에 우리 자신을 데려다 놓는 일은 우리에게만 주어진 몫이다. 그 작은 결단이 매일 새벽 다시 내려질 때, AI 시대의 신앙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길을 잃지 않고 살아 있는 길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