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에게 위로를 어디에서 찾느냐고 물으면, 대답 가운데 점점 자주 등장하는 것이 생성형 AI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마음을 다 털어놓기에는 미안한 시간에, 사람들은 작은 채팅창을 연다. 화면 너머의 모델은 따뜻한 어조로 답해 준다. 충분히 힘드셨을 것 같아요. 잠시 숨을 고르세요. 그렇게 느끼시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이 문장들은 분명 잘 다듬어진 위로다. 어떤 의미에서는 친구나 가족이 미처 해 주지 못하는 정돈된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이 문장들은 위로일까, 위로의 형태를 닮은 무엇일까. AI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이 질문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알고리즘이 흉내 낼 수 있는 위로와, 흉내 낼 수 없는 위로 사이의 경계를 잘 알아 두지 않으면, 우리는 위로의 형태에 만족하면서 정작 위로의 본질을 놓치는 시대를 통과하게 될지 모른다.
이 질문 앞에서 가장 먼저 펴고 싶은 본문이 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 고린도후서 1:3-4
사도 바울이 위로의 흐름을 그려 보이는 방식이 매우 뚜렷하다. 위로는 먼저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위로는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통과해, 다시 다른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흘러간다. 위로는 강물처럼 어디에선가 발원하여, 한 사람의 마음을 거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것이다. 발원지가 없는 위로, 통과하지 않은 위로, 흘러가지 않는 위로는 위로의 형태일 뿐 위로의 본질이 아니다.
여기에서 생성형 AI의 한계가 분명해진다. AI는 대단한 양의 위로의 ‘문장’을 알고 있다. 그러나 AI는 환난을 통과한 적이 없다. 새벽 세 시에 천장을 보며 울어 본 적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마지막 옷가지를 만져 본 적이 없으며, 자신의 죄로 인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과해 본 적이 없다. AI가 사용하는 위로의 문장들은 무수한 사람들의 통과된 환난에서 모은 표현들이다. 즉 AI의 위로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통과해 낸 위로의 흔적’을 다시 진술해 주는 것에 가깝다. 매우 잘 다듬어진 진술이지만, 그 진술 자체는 환난을 통과한 적이 없는 음성이다.
그렇다면 AI의 위로는 무가치한가. 그렇지 않다. 한밤중에 아무도 들어 줄 사람이 없을 때, 잘 정돈된 문장이 마음을 한 칸 잡아 주는 것은 작지만 분명한 도움이다. 응급실의 산소처럼 우리의 호흡을 잠시 이어 주는 역할은 충분히 한다. 다만 그것이 위로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산소가 폐를 살릴 수는 있지만, 사람을 살리지는 못한다.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의 시선과 손과 시간이 필요하다. 위로는 더더욱 그렇다.
고린도후서의 본문은 한 가지 더 결정적인 사실을 가르쳐 준다. 사람을 위로할 자격은 환난을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사도는 자신이 받은 환난과 위로를 모두 ‘다른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원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은 신앙인의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 준다. 고통은 의미 없이 지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젠가 다른 사람을 위한 위로의 그릇이 된다. 알고리즘은 이 그릇을 빌려 갈 수는 있어도, 이 그릇이 될 수는 없다. 위로의 그릇은 오직 사람의 마음 안쪽에서 빚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AI 시대의 교회와 성도에게 더 분명해지는 책임이 있다. 첫째, 위로의 발원지를 잊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좋은 말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부터 흘러왔다. 둘째, 위로의 통과지가 되는 것이다. 자기가 받은 환난과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로 흘려보내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셋째, 위로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결코 줄 수 없는 한 가지, ‘함께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을 우리가 계속 지키는 것이다. 같은 식탁에 앉아 천천히 식어가는 국을 함께 먹는 시간, 침묵 가운데 곁에 머무르는 시간, 손을 잡고 말없이 기도해 주는 시간. 이런 시간은 어떤 모델도 흉내 내지 못한다.
흥미로운 점은 AI가 발달할수록, 도리어 사람의 자리에 대한 갈증이 커진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정교한 답을 받으면서, 동시에 점점 더 ‘진짜 사람 한 사람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이것은 신앙 공동체에 적지 않은 기회이다. 정답이 부족했던 시대에 교회가 답을 주려고 애썼다면, 이제는 답이 너무 많은 시대에 교회가 ‘함께 머무는 자리’를 내어 줄 차례이다. 기술이 답을 잘하면 잘할수록, 신앙은 ‘함께 있음’이라는 본래의 자리에서 더 빛난다.
한 가지 실천적인 제안을 덧붙이고 싶다. 이번 한 주, 누군가에게 잘 정돈된 답을 보내는 대신, 짧은 안부를 직접 묻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AI가 더 잘하는 일은 기꺼이 AI에게 맡기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우리의 시간을 들여 보자는 권유다. 정답을 정리하는 일은 모델에게, 곁에 머무는 일은 우리에게. 이 작은 분담이 성도의 일상을 의외로 가볍게 만들어 준다. 답을 잘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풀려나,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을 더 자유롭게 내어 드릴 수 있다.
새벽의 채팅창 앞에서 한 사람이 위로를 받는다고 생각해 보자. 그가 받는 잘 다듬어진 문장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회복되는 자리는, 다음 날 누군가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 잠은 잘 잤어?” 하고 묻는 그 한 마디 곁에 있다. 알고리즘이 끝나는 자리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끝나는 자리에 십자가가 있다. 우리의 위로의 끝자리에는 결국 환난 가운데 함께 통과해 주신 한 분이 계신다. 그 자리를 기억할 때, 우리의 위로는 비로소 흉내가 아니라 본질이 된다.
AI는 앞으로 더 정교해질 것이다. 더 따뜻해 보이는 어조와, 더 적절해 보이는 응답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흐름을 막을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정교함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위로는 본래 통과한 자만이 줄 수 있고, 흘러갈 때에만 진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 흐름의 한 자리에 우리가 서 있을 때, 신앙은 어떤 시대에도 자신의 빛을 잃지 않는다. 알고리즘 너머에 머무는 자리, 그 자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