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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요셉으로 살아낸 시간 — 창세기 39-41장 다시 읽기


창세기 39장부터 41장까지, 요셉의 이야기를 다시 읽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이야기입니다. 형들에게 팔린 소년, 보디발의 집, 감옥, 바로의 꿈, 그리고 애굽의 총리. 우리는 이 이야기를 대개 마지막 장면부터 거꾸로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결국은 총리가 됐잖아.” 그 한마디가 앞의 모든 고난에 대한 해석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읽으면서 저는 이 이야기의 무게가 결말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요셉이 요셉으로 살아낸 시간, 그 각 장의 시간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 창세기 39:2

형통이라는 말의 낯설음

39장의 이 문장이 오래 걸렸습니다.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말이 노예 상태의 요셉에게 붙어 있습니다. 우리 감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입니다. 팔려온 사람에게 형통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요.

히브리어 원어로는 ‘차라흐(צָלַח)’라는 단어인데, 어원적으로 ‘뚫고 나아가다’, ‘흐름이 막히지 않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상황이 좋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요셉의 삶이라는 물줄기가 어디에 있든 막히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는 뜻에 가깝다는 겁니다. 감옥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흐르는 사람. 저는 그 그림을 오래 보고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배운 관리의 신학

39장의 요셉은 노예이면서 동시에 청지기입니다. 보디발이 그에게 집안일을 전부 맡겼기 때문에, 요셉은 남의 집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청지기 훈련을 받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건 사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41장에서 그가 애굽 전체의 곡식을 관리하게 될 때, 그 실무 감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7년쯤 몸에 익힌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음 장을 위해 이번 장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감옥의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는 장면(40장)도 그렇습니다. 그건 41장의 예행연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왜 아직도 여기지?”라고 물을 때, 하나님은 대체로 “다음을 위해 지금을 짓고 있다”고 대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해질녘의 밀밭

바로 앞에 선 요셉, 그리고 정직한 신학

41장에서 요셉이 바로 앞에 섰을 때 그가 처음 한 말이 저를 오래 붙잡았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 41:16).” 감옥에서 13년을 견딘 사람의 첫 마디가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정확히 되돌려 놓는 문장이었다는 것. 이 한 줄이 요셉이 요셉으로 살아낸 시간의 결론 같습니다.

고난이 사람을 자동으로 성숙시키지는 않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리를 잊지 않은 사람이 성숙합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 위에 누가 계신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 자리로 옮겨보면

결말을 미리 알고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 39-41장은 위로가 되기도 하고, 조금 잔인해지기도 합니다. 요셉은 결국 총리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총리가 되지 않고도 감옥의 시간을 살아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의 핵심은 지위가 아니라 자세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함께 흐르는 사람으로 서 있는 것.

오늘 우리가 있는 자리가 보디발의 집이든, 감옥이든, 아직 이름도 붙지 않은 어떤 대기실이든, 그 자리에서 요셉으로 살아내는 시간이 다음 장의 준비라는 것. 창세기 39-41장이 우리에게 건네는 오래된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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