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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쓴 설교문, 강단에 오를 수 있는가 — 영혼이 빠진 언어의 무게


책상 위에 펼쳐진 성경과 따뜻한 조명이 비추는 묵상의 자리

한 권의 작은 성경 옆에 노트북이 함께 놓여 있는 풍경은 이제 한국 교회의 사역자 책상에서 더 이상 낯선 장면이 아니다. 주일 설교 준비를 위해 본문을 정독하던 사역자가 잠깐 검색창을 열어 본문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 한두 단락의 초안을 AI에게 부탁하는 일은 이미 적지 않은 강단에서 일상이 되고 있다. AI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변화는 충분히 예상되었던 흐름이다. 그러나 신앙의 자리에서 보면 새로운 질문 하나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AI가 쓴 설교문은 강단에 오를 수 있는가. 영혼이 빠진 언어는 회중에게 진정한 위로를 건넬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기술의 효율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말씀의 본질을 다시 묻는 질문이다.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현재의 대형 언어 모델은 매우 유려한 한국어 문장을 생성할 수 있고,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주석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정리해 줄 수도 있다. 사역자가 한 시간을 들여야 할 자료 정리를 모델은 단 몇 분 안에 끝낸다. 강해의 흐름을 잡는 데 필요한 작은 보조 도구로서 AI는 이미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같은 모델에게 강단의 설교문 전체를 그대로 맡기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설교문은 단순한 주석의 묶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한 주간의 기도와 회중의 한 주간의 사정이 한 자리에서 만나 빚어지는 살아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와 그 곁을 비추는 부드러운 빛

모델이 생성하는 설교문에는 본질적으로 결여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발화자의 자리다. 누가 말하는가, 어디에서 말하는가, 어떤 회중을 향해 말하는가. 이 세 가지 자리가 비어 있는 언어는 언어의 형식을 갖출 수는 있어도, 회중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이 권위를 가지는 이유는 그 말이 매끄럽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 뒤에 자기 한 주간의 기도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AI가 만들어 낸 문장은 매끄럽지만 자기 한 주간이 없다. 매끄러움은 듣는 사람의 귀를 잠시 즐겁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회중의 어깨를 부드럽게 누르고, 다음 한 주간을 살아 낼 결을 그 어깨에 얹어 주는 무게는 자기 한 주간을 산 사람의 몫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빌립보서 2:5-7

두 번째 결여는 회중의 자리다. 한 강단에서 한 본문을 두고 두 명의 사역자가 두 편의 설교를 작성하면, 그 두 설교는 결코 같은 모양이 되지 않는다. 한 사역자는 그 주간 자기 회중 가운데 한 가정의 어려움을 알고 있고, 또 한 사역자는 자기 회중의 한 청년이 시작한 새로운 결단을 기억하고 있다. 그 가정과 그 청년의 자리가 본문의 한 구절과 만날 때, 설교문은 비로소 그 회중만의 언어가 된다. AI는 일반적인 회중을 가정한 일반적인 설교문을 매우 잘 만든다. 그러나 일반적인 회중은 어디에도 없다. 어느 강단의 어느 의자에는 어느 한 사람의 한 주간이 앉아 있다. 그 한 사람을 향해 곧장 닿지 않는 언어는 결코 강단의 언어가 될 수 없다.

숲 사이로 길게 들어오는 햇살의 결

세 번째 결여는 기도의 자리다. 좋은 설교문은 본문의 주해 위에 기도의 결이 얹혀 있다. 사역자가 본문을 읽다가 한 구절 앞에서 멈추어 한참을 기도한 그 자리, 자신의 부족을 정직하게 마주한 그 자리, 회중의 이름을 한 명씩 하나님 앞에 올린 그 자리. 그 자리들의 흔적이 설교문의 결에 얹힐 때 회중은 그 결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AI는 기도의 형식을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기도의 자리에서 우러나오는 결은 흉내의 영역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행의 영역이다. 매끄러운 기도문과 거친 한 줄 기도 사이의 차이를 회중의 영혼은 매주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한가. AI는 강단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도구로서의 AI는 사역자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본문의 헬라어와 히브리어 단어 연구를 빠르게 정리해 주고, 다른 시대 다른 사역자들의 강해를 효율적으로 비교해 주고, 설교의 구조 초안을 잡아 주는 일은 모두 AI가 잘하는 일이다. 핵심은 한 줄의 분별이다. AI는 설교의 보조자이지 발화자가 아니다. 설교문의 마지막 형태는 반드시 살아 있는 한 사람의 책상 위에서, 한 사람의 한 주간을 통과한 결로 다듬어져야 한다. AI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모은 자료가, 한 사역자의 무릎 위에서 다시 한 번 천천히 식어 가야만 비로소 강단에 오를 수 있는 무게를 갖게 된다.

이 비움의 마음은 AI 시대의 강단에도 새로운 결로 다시 적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빌립보서의 고백은 사역자에게 두 방향의 비움을 요구한다. 하나는 자기의 효율을 비우는 일이다. AI를 통해 빠르게 정리된 자료를 그대로 강단에 가져가지 않고, 그 자료 위에 자기의 한 주간을 얹어 무게를 다시 다듬는 비움. 또 하나는 자기의 화려함을 비우는 일이다. 매끄러운 모델의 언어를 그대로 모방하기보다, 자기의 거친 말씨와 자기 회중의 결에 맞춘 한 줄을 정직하게 다듬는 비움. 이 두 가지 비움이 함께 작동할 때 AI는 사역자를 대체하지 않고 사역자의 비움을 돕는다. 도구는 결코 발화자의 자리를 가져가지 않는다. 다만 발화자가 자기 자리에 더 정확하게 머물 수 있도록 옆에서 길을 비추어 줄 뿐이다.

이 분별은 회중의 자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회중이 설교를 들으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변화의 큰 부분을 결정한다. 회중이 매끄러운 언어만을 기대한다면, 강단은 점점 더 매끄러운 언어를 향해 휘어질 것이다. 그러나 회중이 자기 한 주간 위에 곧장 닿는 한 줄의 거친 진리를 기대한다면, 강단은 자기 한 주간을 산 사역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AI 시대의 회중은 그러므로 어느 때보다 분명한 자기 기대를 가질 책임이 있다. 매끄러운 언어가 아니라, 자기 한 주간을 산 한 사람의 정직한 한 줄을 기다리는 회중. 그 회중이 있는 강단에서는 AI도 자기 자리를 정확하게 지키게 될 것이다.

AI 시대의 사역자에게 또 하나 권하고 싶은 결은, 정직한 표시의 결이다. 자료 정리에 AI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 다만 강단에 오르는 마지막 언어는 자기 한 주간의 결로 다시 다듬는다는 약속, 그것을 사역자 자신과 회중에게 정직하게 말해 두는 것이 좋다. 이 정직은 사역자의 부담을 덜어 주고, 회중의 신뢰를 깊게 한다. 결국 설교문의 권위는 매끄러움이 아니라 정직함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AI 시대는 오히려 더 분명히 다시 가르쳐 주고 있다.

한국 교회의 작은 교회 사역자의 자리에서는 또 한 가지 결을 덧붙이고 싶다. 본문 연구의 시간이 늘 부족한 작은 교회의 사역자에게 AI는 분명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동반자가 일을 줄여 주는 만큼, 그렇게 비워진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는가를 사역자는 매주 점검할 책임이 있다. 절약된 시간이 다시 회중을 향한 심방의 시간으로, 한 명의 청년과 마주 앉는 한 잔의 차의 시간으로, 자기의 무릎 위 기도의 시간으로 흘러간다면 AI의 자리는 작고 정확하다. 그러나 그 시간이 또 다른 효율을 향해 흘러간다면 AI는 도구의 자리를 넘어서서 사역의 결을 휘게 만들기 시작한다. 도구의 자리에서 도구로 머무느냐 마느냐는 결국 사역자의 시간 사용에서 결정된다.

한 권의 성경 옆에 놓인 노트북은, 그러므로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고 만능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한 사역자의 책상에 새로 추가된 또 하나의 도구이며, 그 도구를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강단의 결은 더 깊어질 수도 있고 얕아질 수도 있다. AI 시대의 강단이 여전히 깊은 결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다. 그 강단 위에 서는 사람이, 자기 한 주간의 기도와 회중의 한 주간의 사정과 본문의 한 구절을 자기 어깨 위에 정직하게 얹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AI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그 어깨 옆에 놓이는 보조 자료일 뿐이고, 어깨 그 자체는 결국 사람의 자리로 남는다. 그 어깨의 자리가 비어 있지 않은 한, 강단의 언어는 매끄러움 너머의 무게를 다음 한 주간에도 회중에게 건넬 수 있을 것이다. 매끄러움 너머의 무게는 결국 한 사람의 자기 비움 위에서만 자라난다. AI 시대의 강단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가장 정직한 신학은 그 한 줄로 요약된다. 강단의 무게는 도구의 발전으로 결코 줄지 않으며, 오직 사람의 비움 위에서만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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