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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아침의 부엌에서 — 카네이션 한 송이가 가르쳐 준 것


오월 팔일 아침. 부엌의 창문 너머로 옅은 햇살이 들어와 식탁 모서리에 잠시 머문다. 어젯밤 잠들기 전 식탁 위에 한 송이 카네이션을 놓아 두었었다. 분홍에 가까운 붉은 꽃 한 송이. 누구를 위한 꽃인가, 한참 들여다본다. 어머니께 직접 드리지 못한 마음, 멀리 계신 시부모께 보내는 마음, 그리고 이미 떠나신 분들을 향해 마저 전하지 못한 마음. 한 송이 안에 그 모든 마음이 포개져 있다.

식탁 위에 놓인 분홍빛 카네이션 한 송이
식탁 위에 놓인 분홍빛 카네이션 한 송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 출애굽기 20:12

출애굽기 20장의 이 말씀은 십계명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첫 계명이다. 위로는 하나님을 향하는 네 계명이 있고, 아래로는 사람을 향하는 여섯 계명이 있다. 그 둘 사이의 다리에 부모 공경이 놓여 있다. 부모를 향한 마음이 하늘과 땅 사이의 연결 고리라는 사실. 그 자리에 한 송이 카네이션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어릴 적에는 어버이날이 그저 한 해의 한 날에 불과했다. 색종이로 카네이션을 만들고, 손편지를 쓰고, 부모님께 안기는 날. 그때는 사랑이 늘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흘러내리는 것이라 여겼다. 자녀는 사랑의 수신자였고, 부모는 사랑의 발신자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랑의 방향이 미묘하게 바뀐다. 부모님이 작아지신다. 작아지시는 만큼 자녀의 마음이 더 자주 그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랑의 방향은 본래 한쪽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었음을.

받은 사랑은 어떻게 갚는가. 사실 갚을 수 없다. 갚는다는 단어는 본래 손익이 분명한 거래를 가리키는 말인데, 부모의 사랑은 거래의 영역을 한참 벗어나 있다. 부모의 새벽은 자녀의 새벽보다 늘 먼저 깨어 있었다. 부모의 식사는 늘 자녀의 식사 다음이었다. 부모의 옷은 자녀의 옷이 새것이 된 다음에야 새것이 되었다. 그 누적된 작은 양보들 위에 한 사람의 일생이 자라났다. 카네이션 한 송이로 그 누적을 다 헤아릴 수 없다. 다만 한 송이가 그 누적을 잠시 떠올리게 할 뿐이다.

그래서 오늘 아침의 카네이션은 어쩌면 부모님께 드리는 꽃이라기보다, 받은 사랑을 잠시라도 의식하기 위한 자기 자신을 위한 표지일지도 모르겠다. 잊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해서 의식하지 못했던 사랑을, 한 해에 한 번이라도 또렷이 떠올리는 일. 그 떠올림 안에서 마음이 가라앉고, 가라앉은 마음 위로 어떤 감사가 솟아오른다.

아침 햇살이 머무는 따뜻한 부엌의 식탁
아침 햇살이 머무는 따뜻한 부엌의 식탁

이미 떠나신 부모님을 가진 사람의 어버이날은 또 다른 빛깔을 띤다. 카네이션을 손에 쥐고도 드릴 자리가 없다. 그러나 신앙은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위로를 건넨다. 부모님이 떠나셨다는 사실은 부모님이 사라지셨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다른 모양으로 함께 계신다는 의미다. 그분들이 평생 가르쳐 주신 어떤 마음, 어떤 습관, 어떤 기도. 그것들이 자녀의 일생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간다. 어버이날 아침의 묵상은 그래서 단지 추모가 아니라 계승이다. 받은 신앙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자리, 받은 사랑을 다음 세대로 옮기는 자리. 떠나신 분의 가장 큰 기쁨은 어쩌면 그곳에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부모를 모시는 자리의 무게도 떠올린다. 가까이 모시는 일, 멀리서 마음만 보내는 일, 그리고 노년의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어느 자리도 결코 가볍지 않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과 부모를 돌보는 무게는 동일하지 않다. 사랑은 마음으로 충분하지만, 돌봄은 시간과 체력과 인내와 분별을 요구한다. 그래서 부모 공경은 한 송이 카네이션의 낭만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결단의 누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십계명의 약속이 단지 의례가 아닌, 일상의 자리에서 매일 다시 결단되는 사랑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어머니,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네 어머니라.” 죽음의 자리에서도 어머니를 잊지 않으신 그분의 모습 앞에서, 부모 공경이 단지 의무가 아니라 인격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가장 큰 고통의 자리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랑을 챙기는 일. 그것이 그분의 마지막 풍경이었다.

오늘은 그래서 무엇을 할까. 거창한 일을 계획하지 않는다. 다만 전화 한 통, 짧은 안부 문자 한 줄, 잠시의 방문, 함께하는 식사 한 끼. 부모님이 가까이 계시지 않다면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며 잠시 기도하는 시간. 이미 떠나신 분이 있다면, 마음 한구석에 그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고 그 위에 한 줄 감사를 올려놓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받은 사랑의 자리에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사랑이 흘러가도록 마음의 물길을 열어 두는 일.

받은 사랑은 가두어지면 고인다. 고인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무거워진다. 사랑은 본래 흘러가는 성질을 가진다.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자녀로부터 다음 세대에게, 그리고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과 낯선 이에게. 어버이날은 그 흐름의 한 마디를 의식하는 날이다. 받았으니 누군가에게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을, 한 송이 카네이션이 가만히 일러 준다.

한 가지 더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가장 자주 하시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려 본다. “밥은 먹었느냐”, “일찍 자거라”, “차 조심해라”. 거룩한 표현 같지 않은 그 평범한 문장들 안에, 사실은 한 사람의 일생을 향한 가장 깊은 기도가 담겨 있었다. 자녀의 안녕을 비는 마음이, 자녀의 안녕을 직접 만들 수 없는 자리에서,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 흘러나온 것이다. 어쩌면 신앙의 가장 정직한 모습도 그렇게 평범한 문장 안에 숨어 있는지 모른다. 거창한 신학이 아니라, “오늘도 무사히”라는 한 줄 안에 깃든 사랑.

식탁 위의 카네이션을 잠시 더 들여다본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좋을 한 송이. 그러나 이 한 송이가 한 사람의 마음을 종일 부드럽게 어루만질 것이다. 부모님을 떠올리는 시간, 받은 사랑을 헤아리는 시간, 그리고 그 사랑을 어떻게 흘려보낼지 골똘해지는 시간. 오월 팔일의 아침은 그렇게 천천히 깊어진다. 부엌의 햇살이 식탁의 가장자리에서 더 길게 늘어진다. 마음 안에 작고 따뜻한 결심 하나가 자라난다. 오늘 하루는 사랑을 흘려보내는 하루가 되기를. 받은 자리에 머물지 않고, 한 사람의 마음에라도 닿아 보기를. 그것이 카네이션 한 송이가 오늘 아침 가르쳐 준 가장 단순하고도 깊은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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