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일곱 시가 막 지난 늦봄의 어느 저녁, 베란다 창을 열어 두면 옅은 흙냄새와 어디선가 떠도는 라일락 잔향이 같이 들어옵니다. 일상이 빠르게 흘러간 한 주의 끝자락, 책상 위에 놓아둔 낡은 가죽 표지의 성경을 다시 펴 듭니다. 굳이 어디를 펼치겠다는 결심도 없이 손이 향한 자리는 늘 그렇듯 시편 23편입니다. 외워 부르듯 익숙한 본문 앞에서, 익숙함이 곧 깊이라는 착각을 잠깐 내려놓고 한 절 한 절을 다시 천천히 읽어 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시편 23편 1~3절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 소유격에 새겨진 신앙 고백
다윗이 이 시편을 적어 내려간 자리는 결코 한가한 자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광야의 동굴이었는지, 통일 왕국의 무게를 짊어진 왕좌의 늦은 밤이었는지, 정확한 시점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생의 모든 자리를 ‘목자와 양’이라는 한 폭의 그림으로 압축해 낼 수 있을 만큼 그가 하나님을 깊이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짧은 시 한 편을 가리켜 ‘진주 같은 시편’이라 부르곤 합니다. 작지만, 빛이 모든 방향으로 흩어집니다.
1절을 잠깐 머무릅니다. 한국어로 옮기면 평범해 보이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YHWH 로이’ 두 단어로 끝납니다. ‘나의 목자’라는 소유격이 핵심입니다. 들판의 목자 일반론이 아니라 ‘나의’ 목자이심을 고백하는 자리. 천지를 지으신 그분이 추상적인 절대자로 머무르지 않고, 다윗 자신의 일상에 들어와 양 한 마리를 직접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신앙의 인격성이 한 단어로 응축됩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다음에 곧장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부족함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부족함의 의미가 다시 정의된 것입니다.
2.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 누움이 곧 신뢰인 까닭
2절 전반부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 양에 대해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이 구절이 그저 평화로운 풍경이 아님을 알아챕니다. 양은 본능적으로 누우려 하지 않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늘 경계하고 늘 움직입니다. 두려움, 갈증, 배고픔, 무리 사이의 긴장 —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풀리지 않으면 양은 결코 다리를 접고 풀밭에 몸을 누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푸른 풀밭에 누인다는 표현 안에는, 목자가 양의 두려움과 갈증과 허기와 무리 안의 긴장을 모두 해결해 주었다는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신앙의 안식이란, 단순히 일을 쉬는 자세가 아니라 마음의 네 가지 매듭을 목자께 맡긴 상태에서 비로소 가능한 자세입니다. 누움은 게으름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목자의 시야를 빌려, 양은 누울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에게도 누울 만한 풀밭이 필요한 시기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아무 데서나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목자가 먼저 길러 두신 곳에서, 그분의 손으로 데려가신 자리에서만 비로소 우리는 다리를 접게 됩니다.
3. 쉴 만한 물 가 — 격류 아닌 잔잔함을 향한 인도

2절 후반부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히브리어 원문은 ‘잔잔한 물 곁’이라는 뉘앙스에 가깝습니다. 양은 격류와 폭포 앞에서는 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흐름이 너무 빠르면 양털이 물에 젖어 무거워지고, 양은 빠지는 두려움 때문에 입을 대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격류를 잔잔한 웅덩이로 옮겨 그 자리에서 양을 먹입니다. 우리 삶에 세찬 격류와 같은 시기가 있습니다. 그 격류 한복판에서 신앙의 갈증을 채우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 격류를 그분의 손으로 둘러 잔잔한 물가로 만드신 다음, 거기서 우리를 먹이십니다.
4.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 회복은 언제나 능동의 동사
3절 전반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 히브리어 ‘소생시키다’는 동사는 ‘돌이키다, 회복시키다, 되돌리다’라는 뜻을 함께 품고 있습니다. 영혼이 한참 멀리 헤매다가 본래의 자리로 다시 데려오게 하시는 그 한 동작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지치거나 무너지면, 회복은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편 23편의 어법에서 ‘회복’은 항상 능동입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회복하려고 애쓰는 자리에서 자주 더 깊은 피로가 쌓이는 까닭은, 회복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려는 무리한 시도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3절 후반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의의 길은 결국 그분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는 고백이 마지막에 자리합니다. 신앙의 끝자락은 ‘나의 평안’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이름의 영광’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목자의 인도는 양의 안락에서 멈추지 않고, 그 인도의 흔적이 보는 이로 하여금 목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회복된 한 영혼이 자기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자리에서 가장 먼저 빛나는 것은 양의 자랑이 아니라 목자의 이름입니다.
5. 오늘 저녁의 자리
저녁 창 밖이 조금씩 어두워집니다. 책상의 작은 등 하나만 남기고 다른 불을 끕니다. 다시 1~3절 다섯 줄을 천천히 읽어 봅니다. 이 짧은 다섯 줄 안에 한 생애를 살아 낼 만한 위로가 그대로 담겨 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고 또 익숙합니다. 익숙함을 깊이로 착각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같은 본문을 다시, 또 다시 펴 들어야 하는 듯합니다. 오늘 저녁, 다시 목자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잠시 양으로서 머물러 봅니다. 누우라고 하시는 푸른 풀밭과, 데려가시는 잔잔한 물가와, 돌이키시는 한 영혼의 회복 앞에. 다윗의 다섯 줄이 우리의 오늘 다섯 줄로 다시 살아납니다.
6. 강해를 마치며 — 익숙한 본문이 다시 살아나는 자리
본문을 다 읽고 나니, 같은 자리에서도 다른 호흡이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우는 본문이 우리의 신앙을 자동으로 깊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외움이 묵상으로, 묵상이 적용으로 자라나는 자리에서만 신앙의 두께가 만들어집니다. 다윗은 이 시를 쓰면서 어떤 자리에서 누구를 보고 있었을까요. 시편의 다섯 줄을 읽는 우리는, 오늘 어떤 자리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까요. 정답을 찾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본문 앞에 자신의 오늘을 가져다 놓기 위한 질문입니다.
늦봄의 저녁 공기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책장에 손가락을 살짝 얹고 본문을 한 번 더 천천히 짚어 봅니다. 작은 등 아래에서 시편의 다섯 줄이 다시 한 번 잔잔히 흘러갑니다. 푸른 풀밭의 누움이, 잔잔한 물가의 마심이, 소생시키는 한 동작이, 오늘 우리의 다섯 줄로 옮겨 와 함께 흐릅니다. 그 다섯 줄을 따라 오늘 밤 다시 한 번, 목자의 자리로 천천히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