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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비도, 언젠가는 그친다


사흘째 비가 내린다. 처음 하루는 반가웠다. 마른 화단이 젖고, 달아오른 아스팔트가 식고, 창문 틈으로 흙냄새가 올라왔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자 반가움은 슬며시 사라지고 눅눅함만 남았다. 빨래는 마르지 않고, 현관의 신발은 늘 축축하고,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도 곰팡이가 피는 것 같다.

장마가 힘든 이유는 비가 많이 오기 때문이 아니다. 언제 그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루만 참으면 된다고 하면 견딜 만하다. 사흘이라고 못 박아 주면 사흘을 센다. 그러나 끝을 모르는 젖음 앞에서 사람은 문득 무기력해진다. 달력을 봐도 소용이 없고, 일기예보는 매일 조금씩 말을 바꾼다. 그래서 우리는 비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기한 없음을 견딘다.

창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 -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계절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계절이 있다

인생에도 장마가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길어지는 병상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소식 없는 이력서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관계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몇 해째 이어지는 마음의 습기다.

그 계절의 특징은 고통의 크기가 아니다. 더 큰 고통을 겪는 사람도 세상에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문제는 크기가 아니라 기한이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느냐고 물을 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그 침묵이 사람을 마르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젖은 계절이 사람을 마르게 한다.

우리는 대개 그럴 때 두 가지 중 하나를 한다. 억지로 밝은 척하거나, 아예 창문을 닫아 버리거나. 전자는 곧 지치고, 후자는 곧 어두워진다. 그런데 성경은 그 어느 쪽도 권하지 않는다. 성경은 비 오는 계절을 부정하지도 않고, 그 안에 영원히 갇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조용히 알려 준다. 계절은 계절이라고. 계절이라는 말 안에는 이미 ‘지나간다’는 뜻이 들어 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 아가 2:11-12

이 구절이 아름다운 이유는 비가 오지 않았다고 말하기 때문이 아니다. 비가 왔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겨울이 있었고, 비가 있었다. 그것을 없던 일로 지우지 않는다. 다만 그 뒤에 두 단어를 붙인다. “지나고”, “그쳤고”. 앞의 겨울과 비가 없었다면 이 두 단어는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성경의 사람들도 젖어 있었다

노아를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방주 이야기를 홍수와 무지개로 기억하지만, 그 사이에는 아주 긴 기다림이 있다. 비가 사십 일 내렸고, 물이 빠지기까지는 그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방주 안에서 노아가 한 일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창을 열고 새를 내보내고, 돌아온 새를 다시 받아들이고, 이레를 기다렸다가 또 내보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성경은 그 지루한 시간 한복판에 짧은 문장 하나를 놓아둔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사.” 물이 아직 빠지지 않았을 때, 창밖이 여전히 물바다일 때 쓰인 문장이다. 상황이 바뀌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기억하고 계셨다는 것. 젖은 계절을 지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실질적인 위로가 있을까 싶다.

요셉도 그렇다. 감옥의 몇 해 동안 그의 이력서에는 아무것도 쌓이지 않았다. 꿈은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고, 그를 기억하겠다던 사람은 그를 잊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니, 그 시간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준비된 시간이었다. 다만 그 사실은 언제나 나중에야 알 수 있다.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결코 알 수 없다.

비는 지금 비의 일을 하고 있다

장마철에 우리는 비를 방해물로만 여긴다. 우산을 챙기게 하고, 약속을 미루게 하고, 기분을 가라앉히는 것. 그러나 농부는 다르게 본다. 지금 이 비가 땅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야 한여름의 뿌리가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겉이 젖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뿌리가 조용히 물을 마시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허락하시는 젖은 계절도 그럴지 모른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진척되지 않는 것 같은 시간. 통장은 줄고, 기도의 응답은 없고, 그저 축축하게 견디는 시간. 그런데 그 시간에만 우리 안에서 자라는 것이 있다. 마른 날에는 결코 자라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기다릴 줄 아는 능력. 남의 슬픔을 한눈에 알아보는 눈. 쉽게 판단하지 않는 조심스러움. 누군가 “요즘 힘들어요”라고 말할 때, 해결책을 내밀기 전에 잠시 함께 있어 줄 줄 아는 마음. 이런 것들은 햇볕에서 자라지 않는다. 오직 젖은 흙에서만 자란다.

비 오는 날에만 자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 그것을 다 자라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때때로 우산을 주시는 대신 비를 조금 더 내리신다. 야속한 일이지만, 나중에 보면 인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비 갠 뒤 젖은 거리에 비치는 저녁 빛 - 비는 언젠가 그친다

눅눅함을 견디는 작은 방법들

그렇다고 젖은 계절을 낭만적으로만 말할 생각은 없다. 습기는 실제로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래서 아주 실질적인 것들이 필요하다.

첫째, 하루치만 산다. 이 계절이 언제 끝나느냐는 질문은 잠시 접어 둔다. 오늘 하루를 살아 내는 것, 그것만 한다. 광야의 만나가 하루치씩만 주어졌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틀 치를 쌓아 두려 하면 상한다.

둘째, 창문을 완전히 닫지 않는다. 비가 온다고 마음의 창까지 닫으면 곰팡이는 더 빨리 핀다. 누군가에게 오늘의 눅눅함을 한 줄이라도 말한다. 다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 말하는 행위 자체가 환기다.

셋째, 몸을 움직인다. 젖은 계절일수록 마음이 아니라 몸부터 무너진다. 우산을 쓰고라도 걷는다. 신앙은 영혼만의 일이 아니다.

비 온 날을 세는 대신, 비 속에서 만난 것을 센다

젖은 계절을 지날 때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날짜를 세는 것이다. 벌써 몇 달째, 벌써 몇 해째. 그렇게 세다 보면 숫자는 점점 무거워지고, 그 무게에 눌려 오늘 하루마저 흐려진다. 세면 셀수록 비는 커진다.

그래서 나는 요즘 다른 것을 세어 보려 한다. 비 온 날을 세는 대신, 비 속에서 만난 것들을 센다. 버스 정류장에서 말없이 우산을 기울여 준 낯선 사람. 별일 없느냐고 묻던 짧은 문자 한 통. 늦은 저녁 혼자 먹은 뜨거운 국밥 한 그릇.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은 하루였지만, 그 하루에도 분명히 있었던 것들.

광야를 사십 년 지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네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다는 것. 사십 년 동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만 보면 그것은 실패한 사십 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긴 시간을 두고 전혀 다른 것을 세신다. 신발 한 켤레, 옷 한 벌, 매일의 만나. 큰 것이 오지 않는 동안에도, 작은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오고 있었다.

젖은 계절의 은혜는 대개 이렇게 온다. 상황을 단번에 뒤집는 방식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겨우 건너게 하는 방식으로. 너무 작아서 은혜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손가락을 꼽아 세어 보면, 생각보다 꽤 많다. 그리고 그 작은 것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작 이 계절에 잠겼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비를 세지 말고 우산을 세어 보자. 며칠째 비가 오는지 말고, 오늘 나를 젖지 않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을 수동적인 상태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기다림은 웅크림이 아니라 붙듦에 가깝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약속을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 손에 힘을 준 채로 버티는 것. 그것은 사실 대단히 능동적인 일이다.

그러니 지금 당신의 계절이 젖어 있다면, 억지로 해를 만들어 내려 애쓰지 않아도 좋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비가 그친 뒤의 땅을 상상하는 것. 젖은 흙에서 무엇이 올라올지 조용히 기대하는 것. 그리고 그때까지, 그저 하루를 산다.

사흘째 비가 내린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비도, 언젠가는 그친다. 그리고 그때 땅은, 비가 오기 전보다 훨씬 깊이 젖어 있을 것이다. 그 깊이만큼, 여름을 견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