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햇살은 정직합니다. 숨을 곳 없이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마른 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그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람은 문득 자신이 광야 한가운데 서 있음을 깨닫습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언제나 통과의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사십 년 광야를 지났고,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사십 일을 광야에서 보내셨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낸 후에야 부르심을 들었고, 다윗은 사울을 피해 광야의 동굴들을 전전하던 시절에 가장 깊은 시편들을 써내려갔습니다. 광야는 목적지가 아니라 길목이지만, 그 길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다림을 ‘견딘다’고 말합니다. 마치 기다림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텅 빈 시간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농부는 압니다. 씨앗이 땅속에서 보이지 않게 보내는 그 침묵의 며칠이, 사실은 가장 분주한 시간이라는 것을.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고, 뿌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여린 싹이 흙을 밀어 올릴 힘을 모으는 시간.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가장 분주한 성장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 이사야 40:31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조급함과 자주 어긋납니다. 우리는 즉각적인 응답을 원하지만, 그분은 종종 우리를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 기다림이 야속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하늘이 닫힌 것 같고, 길을 물어도 침묵만 돌아오는 것 같은 날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바로 그 침묵의 시간이야말로 우리 안에서 가장 깊은 변화가 일어난 자리였음을 알게 됩니다. 응답이 늦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응답을 담을 만한 그릇으로 빚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릇이 작은데 큰 것을 부으면 흘러넘쳐 버립니다. 하나님은 복을 아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을 감당할 우리를 먼저 빚으십니다.
요셉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십삼 년이라는 긴 광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형제들에게 팔리고, 노예가 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시간. 그 어느 한 순간도 꿈의 성취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는 형제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광야의 한복판에서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손길이,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또렷이 보였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실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엮어 가시는 시간입니다.
광야는 또한 우리에게서 군더더기를 덜어냅니다. 풍요로울 때 우리는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장식인지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줄어들고 의지할 것이 하나둘 사라질 때, 비로소 무엇이 끝까지 남는지를 보게 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만나를 통해 배웠습니다. 내일 것을 미리 쌓아둘 수 없고, 오직 오늘 하루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그것은 결핍의 훈련이 아니라 신뢰의 훈련이었습니다. 손에 쥔 것이 적을수록, 붙드는 손의 힘은 오히려 강해집니다. 광야는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 자리가 아니라, 무엇이 참된 부요인지를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기다림은 듣는 법을 가르칩니다. 분주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에 둘러싸여 삽니다. 계획과 염려, 욕심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떠들어 댑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가 잦아드는 광야의 고요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작고 세미한 음성을 분별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들었던 것은 강한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의 세미한 소리였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광야로 인도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너무 많은 소리에 지친 우리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실 고요한 자리 하나를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도 마지막에는 기다리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그들은 곧장 일하러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락방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열흘의 기다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던 그 시간 끝에 오순절의 불길이 임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흩어졌다면, 그 능력의 임함을 놓쳤을 것입니다. 때로 가장 영적인 행동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기다림의 자리에 서 있다면, 그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 호세아 2:14
광야는 버림받은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친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말로 위로’하십니다. 사람이 많고 길이 환할 때는 듣지 못하던 그 위로의 말을, 마른 들 한가운데서 비로소 듣게 됩니다. 광야는 형벌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둘만의 시간으로 부르시는, 사랑하는 이의 조용한 초대입니다.
광야에도 길이 있습니다. 다만 그 길은 멀리서 보이지 않고, 한 걸음을 내디딘 사람에게만 다음 한 걸음의 자리로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의 마른 길 위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 이미 길을 내고 계십니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 우리는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도리어 그 광야에서 가장 귀한 것을 얻었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오늘 하루의 만나로 충분합니다. 한 걸음이면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다림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기다림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있고, 두 손을 펴서 받을 준비를 하며 깨어 있는 능동적인 기다림이 있습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의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를 가른 것은 기다림의 길이가 아니라 그 기다림의 자세였습니다. 모두가 졸았고 모두가 잠들었지만, 준비된 자만이 문이 열릴 때 들어갔습니다. 오늘의 기다림 속에서도 우리는 등불에 기름을 채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광야의 계절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것은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신앙의 한 과정입니다. 가장 푸르른 나무도 겨울을 통과하며 뿌리를 깊이 내리듯, 가장 깊은 믿음도 광야를 통과하며 단단해집니다. 그러니 오늘 마른 길 위에 서 있다 하여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길의 끝에는 반드시 푸른 초장이 있고, 그 초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우리보다 앞서 걷고 계십니다. 기다림은 그 목자의 발걸음에 우리의 속도를 맞추는 법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오늘도, 그분의 걸음을 신뢰하며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