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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앞에서 — 세미한 바람에 기대어 앉은 저녁


저녁 여덟 시 반. 창문을 열어두었지만 바람이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밤이었습니다. 낡은 선풍기를 꺼내 방 한가운데에 놓았습니다. 스위치를 돌리자 잠깐 덜컹거리다가 이내 익숙한 소리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목이 조금 뻣뻣해진 그 오래된 기계가 오늘도 제 몫의 바람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선풍기 앞에 얼굴을 대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뭘 하려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 바람이 이마를 지나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것을 잠자코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상하게 그런 순간에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대단한 위로의 말도 없고, 극적인 응답도 없는데, 어떤 저녁은 그 바람 하나로 하루가 정리됩니다.

그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 열왕기상 19:12-13

큰 것이 오지 않아도 괜찮은 저녁

엘리야가 호렙산 굴에서 하나님을 만나던 밤을 저는 자주 떠올립니다. 강한 바람이 지나갔고, 지진이 흔들었고, 불이 왔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정작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 속에 오셨습니다. 세미한, 그러니까 작고 잔잔한 소리. 굳이 옮기자면 선풍기 소리쯤 되는 크기의 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놓치는 게 바로 그런 크기입니다. 인생을 통째로 흔드는 응답을 기다리다 보면, 정작 이마를 스치는 저녁 바람 같은 은혜는 지나가버립니다. 오늘 이 바람이 얼마나 정직한지, 얼마나 성실한지, 저는 잊고 있었습니다. 스위치를 돌리면 돌아가고, 앞에 앉으면 어김없이 저를 향해 불어옵니다. 그런 은혜가 있습니다. 이름도 붙지 않고, 간증거리도 되지 않지만, 매일 저녁을 살게 하는 은혜.

돌아가는 것들에 기대어 살아온 하루

생각해보면 오늘 하루도 그런 것들에 기대어 살았습니다. 아침에 눈을 뜬 시계, 물을 끓여준 주전자, 지하철을 데려다준 그 노선, 저녁에 밥이 되어준 전기밥솥. 어느 것 하나 극적인 게 없지만, 하나라도 멈추면 하루가 어긋납니다.

믿음의 자리도 그런 결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 두 페이지 읽는 성경, 지하철에서 한 줄 부르는 찬양, 밤에 하는 짧은 감사기도. 뭐 하나 굉장한 것은 없지만, 그것들이 돌아가고 있어서 오늘도 마음이 뒤집히지 않았습니다.

창가에 앉은 선풍기와 저녁 햇살

선풍기 앞에서 드리는 짧은 기도

선풍기 앞에서 아주 짧게 기도했습니다. 오늘도 세미한 바람으로 오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큰 것이 오지 않은 하루였지만, 이 바람 하나가 저녁을 살게 했습니다. 내일도 굳이 큰 것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처럼 저를 향해 정직하게 불어와 주십시오.

바람은 여전히 얼굴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세미한 소리, 세미한 위로, 세미한 은혜. 그 정도면 충분한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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