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마지막 주 목요일의 새벽이다. 도시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창밖 가로등의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가 새벽 바람에 천천히 흩어진다. 책상 위 빈 유리잔을 한참 만져 본다. 차가운 손끝과 차가운 잔이 만나 그 자리에 오래 머문다. 보리차 한 주전자를 다시 데웠다. 김이 천천히 잔 안으로 차오른다. 처음에는 잔의 바닥부터, 그다음에는 잔의 옆구리를 따라 위로, 위로. 마침내 잔의 입술 위로 김이 한 줌 부드럽게 흘러넘친다. 그 순간 시편 이십삼편이 마음 안에서 조용히 펼쳐졌다.
오랫동안 알아 온 구절이다. 늘 외우는 시편의 한 자락이었다. 그런데 오월 마지막 주의 새벽에 만난 그 한 줄은 다르게 와 닿는다. 잔이 흘러넘친다는 그 한 마디. 누가 누구의 잔에 무엇을 부어 흘러넘치게 하시는가. 그 잔의 자리에 무엇이 있는가. 보리차 한 잔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잔, 그 안에 천천히 차오르는 어떤 따뜻한 것이 있다는 비유가 새벽의 적막 안에서 더 무거우면서도 동시에 더 가볍게 다가왔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 잔이 넘치나이다
— 시편 23편 1-5절
내 잔에는 그동안 무엇이 채워졌는가. 오월 한 달을 천천히 돌아본다. 회의의 자리, 차 안에서의 침묵,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밤, 가족에게 일찍 잠들라고 한마디 건네지 못한 저녁들. 부끄러움의 자리 위에도, 후회의 자리 위에도, 그분의 손이 가만히 차를 부으셨다는 사실을 새벽의 김 한 줄기 앞에서 다시 본다. 데일리QT는 거창한 신학 정리가 아니다. 그것은 잔의 안쪽 벽을 따라 천천히 차오르는 한 줌의 따뜻함을 가만히 알아채는 일이다.
목양자의 손은 잔을 채울 때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분은 부족함의 자리에서 풍성함을 만드시는 분이지만, 그 작업은 늘 새벽처럼 조용하다. 큰 소리로 부어 주지 않으신다. 큰 폭포처럼 쏟아붓지 않으신다. 김 한 줄기, 빛 한 조각, 새벽 새가 우는 첫 음정, 누군가의 안부 한 줄. 그 작은 것들의 누적이 결국 잔의 입술 위로 흘러넘치는 풍성함을 만든다. 시편의 기자는 그 누적의 끝에서 한 문장으로 말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 한 문장 안에는 평생의 동행이 농축되어 있다.

오늘 데일리QT의 자리에서 한 가지를 묻는다. 나는 내 잔 안에 무엇을 더 부으려고 애쓰고 있는가. 어떤 성취, 어떤 인정, 어떤 안전망. 그 모든 것들은 잔 바깥에서 잔 안으로 흘러들어 가야 한다고 우리는 믿어 왔다. 그러나 시편 이십삼편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잔은 이미 채워지고 있다. 부어 주시는 분이 계시다. 우리는 그저 그 김을 알아보는 자, 그 김 앞에서 한 손을 들고 감사하는 자일 뿐이다.
새벽 다섯 시 반, 보리차의 김이 조금 잦아들기 시작한다. 잔의 입술 위로 흘러넘쳤던 김의 흔적은 이미 공중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따뜻한 잔은 여전히 손바닥 안에 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어 본다. 보리향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퍼진다. 오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되는 목요일 새벽, 그분의 손이 부어 주신 한 잔을 천천히 마신다. 잔이 흘러넘친다는 그 한 줄의 무게가 오늘 하루를 따라다닐 것 같다. 회의의 자리에서도, 가족과의 식탁에서도, 마지막 늦은 밤의 침대에서도 그 김의 기억을 다시 꺼내 보게 될 것 같다. 데일리QT는 그렇게 시작된다. 새벽의 빈 잔과 김 한 줄기와 시편의 한 절. 그 세 가지로 충분한 아침이다.
잔의 입술 위로 흘러넘치는 김이라는 비유는 결국 우리의 시야를 바꾸는 비유이다. 우리는 부족함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매일 점검한다. 부족한 시간, 부족한 자본, 부족한 인내, 부족한 관계의 깊이. 그 부족함의 목록은 끝이 없다. 그러나 시편 이십삼편의 새벽 앞에 한 번 무릎을 내리면, 그 부족함의 목록 위에 한 줄의 다른 문장이 가만히 얹힌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분의 시선으로 다시 본 내 잔은, 이미 흘러넘치는 잔이다. 그 사실을 알아채는 일이 오늘 데일리QT의 결론이다.
새벽의 마지막 별이 창밖에서 천천히 흐려진다. 보리차의 향은 아직 잔의 입술 가에 머물러 있다. 시편 이십삼편의 첫 절을 다시 읊는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목자라는 단어 안에는 평생의 동행이 압축되어 있다. 짧은 동행이 아니다. 한 계절의 만남도 아니다. 양 한 마리가 태어나는 그 자리부터, 그 양이 푸른 풀밭과 마른 들판과 험한 골짜기를 거쳐 마지막 호흡에 이르기까지의 전 시간을 함께 걸으시는 분이라는 신앙고백이다. 그 동행의 사실이 잔이 흘러넘친다는 이미지의 뿌리가 된다.
새벽의 데일리QT는 그렇게 한 절씩 천천히 익어 간다. 한 절을 읽고 잔을 한 모금 마신다. 또 한 절을 읽고 창밖의 가로등을 바라본다. 시편의 한 자락은 정보가 아니라 동행이다. 그 한 자락은 머릿속 지식의 양을 늘리는 일에 봉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의 호흡의 결을 가다듬는 일에 봉사한다. 오월 마지막 주의 새벽이 그 한 자락 안에서 천천히 밝아 온다.
창밖에 첫 새가 울기 시작한다. 작은 새의 첫 음정은 가늘고 짧다. 그러나 그 첫 음정은 도시 전체를 깨운다. 시편 기자의 한 줄도 그렇다. 한 사람의 새벽 안에서 작고 가늘게 울리지만, 그 울림은 결국 그 사람의 하루를 천천히 흔들어 깨운다. 회의실에서, 출근길에서, 가족과의 식탁에서, 마지막 늦은 밤의 침대에서. 새벽에 만난 한 줄의 시편이 하루 전체의 결을 바꾼다.
오늘의 데일리QT를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를 적어 둔다. 내 잔에 차오르는 김이 어떤 모양인지 매일 한 번씩은 들여다보자. 차의 종류가 무엇이든, 잔의 모양이 어떻든 그 안에 부어 주시는 분의 손은 한결같으시다. 그 손의 한결같음을 신앙이라고 부른다. 시편 이십삼편의 마지막 절은 그 신앙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노래한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새벽의 빈 잔에서 시작된 한 줄의 묵상이 영원이라는 단어 안에서 천천히 마침표를 찍는다.
잔이 흘러넘친다는 한 마디는 단지 풍성함의 비유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어떤 자리는 잔 바깥으로 흘러야 한다는 사실을 함께 일러 준다. 잔의 입술 위로 흘러넘친 김은 결국 공기 안으로 사라진다. 누구의 잔에 다시 담길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라짐 자체가 풍성함의 증거이다. 다 담기지 않는 것이 흘러넘침의 본질이다. 우리의 삶의 어떤 자리도 그렇다. 다 가둘 수 없는 어떤 감사, 다 정리할 수 없는 어떤 사랑,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위로. 그 흘러넘침의 자리들이 결국 한 사람의 잔의 풍성함을 증명한다.
오늘 새벽의 보리차 한 잔이 그 사실을 다시 가르쳐 주었다. 잔의 입술 위로 사라진 김은 한 줌의 따뜻함을 공기 안에 남겼다. 그 따뜻함은 다시 잔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따뜻함의 흔적이 새벽의 책상 위 공기의 결을 한 단계 더 부드럽게 했다. 시편 이십삼편의 잔이 흘러넘친다는 한 줄도 같은 일을 한다. 그 흘러넘침은 한 사람의 잔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흘러넘침의 흔적이 그 사람의 하루의 공기를 한 단계 더 부드럽게 한다. 그 사람의 가정, 그 사람의 직장, 그 사람의 인간관계 전체의 공기를 한 단계 더 따뜻하게 한다.
데일리QT를 마치고 잔을 비웠다. 빈 잔을 다시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내일 새벽에 다시 보리차를 데울 것이다. 다시 빈 잔에 김이 천천히 차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줄의 시편이 그 김 위에서 익어 갈 것이다. 매일의 데일리QT는 그렇게 작은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큰 사건이 아니다. 화려한 결단의 자리가 아니다. 빈 잔과 김 한 줄기와 한 절의 시편. 이 세 가지가 매일 반복되는 자리가 결국 한 사람의 신앙의 결을 만든다. 오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이 그 결의 한 자락 안에서 천천히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