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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 존스 George H. Jones


존스 George H. Jones, 조원시, 1867-1919, 미북감리회

존스는 21세가 되던 1888년 최연소로 조선에 온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1892년부터 제물포지역 책임자로 부임하며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세운 웨슬리교회를 ‘내리교회’라 이름을 바꾸고 1893년 여선교사 벵겔과 결혼하여 함께 11년 동안 선교와 봉사를 이어갔습니다.

구한말 한국에서는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노동자나 농민들이 극심한 생활난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습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와이 이민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설득작업에서 당시 인천내리교회의 존스라는 선교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원시’라는 한국이름을 가진 존스는 내리교회의 한국인 신자들을 통해 그들의 친지나 이웃사람들에게 하와이 행을 설득했으며 서울 등지에도 직접 다니면서 교인들에게 하와이 이민 모집에 응할 것을 권고했던 것입니다.

본래 존스 선교사는 목회적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가 1892년 아펜젤러 목사의 뒤를 이어 제물포구역 담임자로 파송되었을 때 내리교회에는 단 한 명의 교인이 있었지만, 부임 1년 만에 교회는 세례교인 9명과 학습인 23명으로 부흥했습니다. 또한 전도의 방편으로 영화학교라는 신식학교를 설립(1893년)하여 교회발전을 급속히 이루었습니다. 한국의 역사와 사회풍속 등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성서번역위원으로 일하는 한편 영어사전을 편찬하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1892-1893년에는 배재학당장을 지냈고, 1903년에는 〈한국기독교청년회〉 창설에 공헌하였으며, 1892년 찬미가를 편찬하여 찬송가를 보급하는 일도 도왔습니다.

2005년 7월 18일, 인천시 내리감리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교회창립 120주년을 기념하여 존스 선교사의 활동 및 업적을 재조명했던 학술세미나의 평가들이, 그의 능력과 업적을 잘 말해줍니다. “한국에 온 최연소 선교사였던 존스 선교사는 한국역사와 종교, 문화와 풍속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학자였다.” “연합정신을 강조한 존스 선교사의 신학교육은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해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형성하는 데 신학적인 토대를 놓았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를 배출해 기독교 민족운동이 확산되는 데도 밑바탕이 됐다.” “존스 선교사가 1900년 순한글로 창간한 한국최초 신학잡지인 「신학월보」는 한국기독교와 일반역사 및 문화에까지 중요한 영향을 준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존스는 현대식 교육을 위해 1892년 영화학교를 세우고 부인 벵겔선교사는 여자영화학교를 세웠습니다. 이는 제물포지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이었습니다. 또한 지역별로 조직한 ‘신학회’가 이후 감리교신학대학의 전신인 협성신학교로 발전해 존스가 초대 학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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