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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 알고리즘과 중보의 자리


최근에 어떤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힘든 밤, 아무에게도 전화하기 어려운 시간에 AI 챗봇을 열어 “내 대신 기도해 줄 수 있어?”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챗봇은 부드러운 문장으로 위로하는 기도문을 써 주었고, 그분은 그것을 두 번 읽고 겨우 잠들었습니다. 나쁜 밤이 좋은 새벽으로 넘어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내가 받은 그건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기도인가요, 아닌가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로마서 8:26

기도문과 기도의 거리

먼저 정리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챗봇이 생성한 문장은 정확히 말하면 ‘기도문’입니다. ‘기도’ 자체는 아닙니다. 기도는 문장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방향이 있는 인격적 대화입니다. 그러니 알고리즘이 아무리 정갈한 기도문을 지어도, 그것이 곧바로 기도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렇게 잘라 말하고 나면, 그날 밤 그분이 받은 위로가 무엇이었는지가 남습니다. 그건 무엇이었을까요.

기도문을 매개로 지나가는 성령의 자리

로마서 8장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 기도조차 다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조심스럽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날 밤 그분이 챗봇의 문장을 읽으며 눈물이 났다면, 문장을 지은 건 알고리즘이었지만, 그 문장 앞에서 마음을 여신 건 하나님이었을 수 있다고요.

이건 ‘알고리즘이 기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알고리즘은 여전히 계산기입니다. 다만 인간이 그 문장을 읽으면서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가져다 놓는 순간, 기도가 시작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매개는 나무 십자가일 수도, 오래된 성경일 수도, 오늘 밤에는 챗봇의 문장 한 편일 수도 있습니다. 매개가 성령을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성령이 매개를 통과해 오시는 것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두운 방 안 노트북 화면의 은은한 빛

그럼에도 남는 몇 가지 경계

그렇다고 해서 챗봇이 목회자를 대체하거나, 공동체의 중보기도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세 가지가 걸립니다.

첫째, 챗봇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이름을 넣어도, 상황을 설명해도, 그 사람에 대한 인격적 사랑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 성경이 말하는 중보는 언제나 인격적 사랑에서 나옵니다.

둘째, 챗봇의 위로는 즉각적이지만 공동체 없이 자기 안으로 닫히기 쉽습니다. 밤새 챗봇과 대화하고 아침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위로는 있었지만 관계는 자라지 못합니다.

셋째, 챗봇은 회개시키지 못합니다. 성령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우리를 부드럽게 그러나 정직하게 회개의 자리로 이끄시는 것인데, 알고리즘은 사용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늘 편하게 해주는 위로만 반복하면 우리는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쓰기로 합니다

그날 밤 그분이 받은 것을 저는 이렇게 정리해드렸습니다. 챗봇이 지어준 것은 ‘기도문의 초안’이라고. 그 문장을 읽는 동안 하나님 앞에 마음을 가져다 놓은 그분의 움직임이 ‘기도’라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분이 신뢰하는 누군가에게 그 밤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기도의 마지막 마디라고요.

기술은 도구입니다. 도구는 성령의 자리를 뺏지 않습니다. 다만 도구를 쓰는 우리가 그 자리를 헷갈리지 않아야 합니다. 알고리즘 시대의 신학은 이 경계를 정직하게 지키는 데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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