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유월의 첫 월요일 오후, 책상 위의 화면에는 두 개의 창이 동시에 열려 있다. 한쪽에는 어제 저녁까지 정리해 두었던 생성형 AI 도구 비교표가, 다른 한쪽에는 오랫동안 곁에 두고 읽어 온 시편 8편의 한 페이지가 있다. 두 화면을 동시에 마주하는 시간은 갈수록 자연스러워졌다. 신앙은 늘 시대를 가로지르는 자리에 있어 왔고, 오늘 우리가 마주한 시대의 풍경 안에는 거대한 언어모델과 자율 에이전트와 멀티모달 추론기가 매주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 풍경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다시 천천히 멈춰 묻게 되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결코 새 질문이 아니다. 시편 기자는 이미 수천 년 전에 광야의 밤하늘 아래에서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본문이 던지는 이 질문이 오늘처럼 다시 무겁게 다가오는 시대는 흔치 않을 것이다. AI가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내고, 인간의 그림을 학습하고, 인간의 추론 패턴을 모방하는 시대일수록, 사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야 할 신학적 질문이 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 시편 8편 4-5절
본문의 답은 의외로 단순하면서도 단단하다. 인간은 그분의 생각과 돌봄을 받는 존재다.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그분의 시선이다. 본문은 인간의 우월성을 도구적 성취로 정의하지 않는다. 본문은 인간의 위치를 그분의 관계 안에서 정의한다. 그리고 이 정의는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만일 인간을 도구적 성취로 정의하는 신학을 우리가 잠시라도 받아들인다면, 그날부터 우리는 능력의 비교 안에서 자신의 존엄을 잃기 시작한다. AI가 더 빠르게 글을 쓰고, 더 정확하게 이미지를 만들고, 더 방대하게 정보를 정리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렇다면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시편 8편은 인간의 자리를 능력의 비교 안에서 찾지 않는다. 본문은 그저 한 가지 사실을 단단히 붙든다. 인간은 그분이 친히 생각하시는 대상이며, 그분이 친히 돌보시는 대상이라는 사실. 본문의 그 두 동사가 인간의 본질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결정은 능력의 출현이나 도구의 등장으로 결코 변경되지 않는다. AI가 무엇을 더 잘 하든, 무엇을 새로 만들든, 그것은 인간의 본질을 흔드는 변수가 되지 못한다. 본문이 정의한 인간의 자리는 그분의 시선 안에 있고, 그 시선은 시대를 가로지르며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창세기 1장 27절을 함께 펼쳐 본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본문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깊은 정체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 안에 들어 있다. 신학사적으로 이 표현은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한 가지 만큼은 늘 공통적으로 확인되어 왔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능력이나 기능의 목록이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부여되는 존재의 자리라는 사실. AI가 가질 수 있는 능력의 목록이 아무리 늘어난다 해도, 그 자리는 결코 양도되지 않는다. 능력은 시뮬레이션될 수 있지만, 관계 안에서 부여된 존재의 자리는 결코 시뮬레이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은 AI라는 도구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AI를 신학적 위협으로 다루는 것은 본문이 가르치는 인간론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문이 인간의 자리를 그분의 시선 안에서 단단히 정의하고 있는 한, AI는 인간을 위협하는 변수가 아니라 인간이 다스려야 할 또 하나의 피조 영역으로 자리매김된다. 창세기 1장 28절이 말하는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는 본래 자연 세계에 대한 청지기 위임이지만, 동일한 신학적 결을 따라 인간이 만들어 낸 도구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도구의 종이 되지 않고, 도구를 다스리는 청지기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 그것이 본문이 일러 주는 신학적 방향성이다.
그러나 다스리라는 본문의 위임은 결코 무한한 권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문이 위임한 다스림은 늘 그분의 형상으로서의 다스림이며, 그분의 성품을 닮은 다스림이다. AI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본문 앞에서 다시 점검해야 할 핵심이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는 AI를 사용함에 있어, 인간을 더 깊이 사랑하는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AI를 도구로 다루되, 그 도구가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는가. 우리는 AI가 만들어 낸 결과물 앞에서, 그분의 형상이 새겨진 인간의 존엄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가. 본문은 이 세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다시 던진다.
현장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인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두 가지 정서는 흥미와 두려움이다. 흥미는 새로운 도구의 가능성 앞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정서이고, 두려움은 그 가능성이 우리의 자리를 침범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흘러나오는 정서다. 본문은 이 두 정서를 모두 신학적으로 다시 정돈한다. 흥미는 그분의 형상이 부여한 창조적 호기심의 연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두려움은 본문이 정의한 인간의 자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함으로써 그 뿌리가 가만히 잠재워질 수 있다. 인간의 자리가 능력의 비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시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단단히 붙들 때, 두려움은 더 이상 우리의 일상의 결정을 지배하지 못한다.
한 가지 실천적 결단을 작은 노트에 적어 둔다. AI 도구를 사용하는 시간 옆에, 본문을 펴 두는 시간을 의도적으로 함께 배치할 것. 도구 앞에서 보내는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본문 앞에서 보내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지도록 일정의 균형을 새로 조정할 것. 효율은 도구가 가져다 줄 수 있지만, 인간의 자리는 도구가 결코 가져다 줄 수 없다. 그 자리는 오직 본문 앞에서, 그분의 시선 안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도구는 일을 빠르게 만들지만, 본문은 사람을 깊게 만든다. 새 시대의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신학적 리듬이 바로 이 균형의 자리다.
한 시간의 신학적 묵상을 닫으며 화면의 두 창을 다시 정렬한다. 비교표가 담긴 창은 도구의 풍경을 보여 주고, 시편 8편이 담긴 창은 그 도구를 다루는 인간의 자리를 보여 준다. 두 풍경을 동시에 마주하는 일이 결코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정직한 신학의 자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본문이 말하는 인간의 자리는 변하지 않고, 본문이 위임한 청지기의 책임은 시대를 따라 새로운 옷을 갈아 입을 뿐이다. AI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본문이 들려주는 가장 짧은 답은 결국 한 줄로 압축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그 한 줄을 손에 쥐고 오늘 오후의 도구 앞에 다시 앉는다. 능력의 비교가 아니라 그분의 시선 안에서, 위협의 정서가 아니라 청지기의 책임 안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새 시대를 신학적으로 통과해 나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