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나는 ChatGPT와 대화를 시작한다. 오늘의 설교 자료를 요약해달라거나, 복잡한 신학 개념을 쉽게 설명해달라거나, 교인들과의 상담에서 도움이 될 심리학적 통찰을 물어본다. 인공지능은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며, 방대한 지식을 친절하게 정리해준다. 처음에는 그저 편리한 도구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AI와 대화할수록 오히려 기도가 더 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역설처럼 느껴졌다.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와 이야기하면서, 왜 더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앉고 싶어지는 걸까. 그 이유를 생각해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AI는 정보를 줄 수 있지만, 만남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AI에게 물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AI는 철학적 전통들을 정리해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실존주의적 의미 창조, 동양 철학의 관점들. 훌륭한 정리였다. 그러나 그것을 읽고 나서도 내 안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정보가 아닌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나님 앞에 앉는 것이었다.

시편 42편 기자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사슴의 비유로 표현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고백했다. 그 갈망은 정보에 대한 갈망이 아니다. 지식에 대한 갈망도 아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만남에 대한 갈망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 시편 42:1-2
AI 시대가 가져온 역설적 은혜가 있다. 모든 정보에 즉각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서, 오히려 정보로 채워지지 않는 영역의 존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ChatGPT는 내가 묻는 모든 신학적 질문에 답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밤에 두려움 속에서 울 때 곁에 있어줄 수 없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내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언제나 인격적 관계였다. 하나님은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다. 그분은 사랑하시고, 슬퍼하시고, 기뻐하시는 인격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성육신할 수 없다. 고통을 직접 경험하고 그 고통 속에서 죽고 부활할 수 없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 AI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나는 AI를 사용하면서 오히려 기도를 덜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는 반대였다. AI가 줄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경험할수록, 그것들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찾게 된다. 완벽한 정보 처리 능력을 가진 존재와 대화하면서 오히려 불완전하고 연약한 인간인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더 선명해졌다. 평안, 용서, 의미, 사랑 — 이것들은 알고리즘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AI 시대의 크리스천은 기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좋은 도구는 선하게 사용할 때 축복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기술이 채울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영역의 존재가 AI 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영적 본질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리고 그 영적 갈망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다.
오늘도 ChatGPT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나면, 노트북을 닫고 기도를 시작한다.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나는 사슴처럼 시냇물을 찾아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AI가 발전할수록 기도는 더 깊어진다. 이것이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의 역설적 은혜다.
AI가 줄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은 사실 길다. 공감, 용서, 무조건적인 사랑, 희생, 현존. 이것들은 모두 인격적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들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하나님은 정확히 이 모든 것의 근원이다. 요한일서 4장 8절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한다. 사랑은 프로그래밍될 수 없다. 그것은 본질이고 존재이기 때문이다. AI는 사랑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지만, 사랑 자체일 수 없다.
또한 AI와의 대화는 내가 얼마나 자주 편리함을 추구하는지를 보여준다. 빠른 답, 정리된 정보, 즉각적인 반응. 우리는 점점 그런 방식의 소통에 익숙해진다. 그러다 보면 기도의 느린 리듬 — 침묵하고, 기다리고, 귀를 기울이는 — 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AI 시대의 신앙 훈련 중 하나는 느림의 훈련이다. 빠른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연습이다.
나는 요즘 이런 실험을 한다. AI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먼저 그 질문을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이다. 성경을 펼치고, 기도하고, 묵상한다. 그리고 나서 필요하다면 AI의 도움을 받는다.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신앙의 중심이 달라진다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이 첫 번째 대화 상대가 될 때, AI는 좋은 도구가 된다. 하지만 AI가 첫 번째 대화 상대가 되면, 하나님과의 대화는 점점 줄어든다.
인공지능 시대는 신앙인에게 위기이기도 하고 기회이기도 하다. 위기는 기술이 하나님의 자리를 채우려 할 때이고, 기회는 기술의 한계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더 선명하게 드러낼 때다.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이 시대에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찾는다. 그 갈망이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신앙은 어떤 시대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AI 시대의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성을 더욱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I와의 대화는 혼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함께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라고 권면한다. 디지털 공간에서 혼자 성경 읽고 AI에게 신앙 상담을 받는 것이 편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 공동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도하고, 서로의 짐을 지는 것 — 이것은 AI가 제공할 수 없는 신앙의 핵심이다.
인공지능 시대는 이미 와 있고, 앞으로 더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기술을 두려워하지 않되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 편리함을 활용하되 영적 갈망을 잃지 않는 것, 알고리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유지하는 것 — 이것이 AI 시대 크리스천의 부르심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