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오후, 동네 약국 앞 작은 화단 옆에 한 할머니가 서 계셨다. 두 손에는 검은 비닐 장바구니가 둘 들려 있었고, 한쪽은 무겁게 기울어져 있었다. 약국 유리문에 비친 햇빛은 오후 세 시의 부드러운 결로, 할머니의 굽은 어깨 위에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차를 잠시 길가에 세워두고 약을 찾으러 들어가던 길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약을 받아 들고 돌아 나오면 약속에 늦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괜한 친절”이라는 단어가 마음 한구석에 늘 머무는 사람이 나였다. 모르는 어른께 도움을 드리려 하면 도리어 미안해하시는 분도 있고, 거절당하는 어색함도 두려웠다. 그러나 약국 안에서 약을 받는 동안에도, 자꾸 그 굽은 등이 유리문 너머에서 어른거렸다.

약을 받아 나오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할머니, 어디까지 가세요. 짐이 무거워 보이세요.” 짧은 한마디 뒤에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리시다, “저기 골목 안 빌라까지”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차로 5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장바구니를 받아 들자 손목이 가볍게 휘청였다. 두 개를 합치면 십 킬로는 넘을 것 같았다. 무엇이 이렇게 무거운가 했더니 쌀 한 봉지와 김치 두 통, 그리고 손주에게 줄 과일이 들어 있다고 하셨다.
운전을 시작하자 할머니는 말씀이 적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거리만 가만히 바라보셨고, 가끔 “이게 또 폐를 끼치네요” 하고 작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저 “괜찮아요, 마침 가는 길이에요”라고만 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가는 길은 어디로든 만들 수 있는 것이니까. 빌라 앞 골목에 차를 세우고 장바구니를 현관 안쪽까지 들어드리니, 할머니는 다시 한 번 깊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셨다. 차로 돌아오는 길에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졌고, 동시에 부끄러워졌다. 나는 왜 처음에는 그냥 지나치려 했을까.
차 안으로 돌아와 시동을 걸지 않고 잠깐 앉아 있었다. 그러자 한 본문이 마음에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 온, 그러나 늘 다시 새로워지는 비유. 강도 만난 사람과 그 곁을 지나간 사람들, 그리고 자기 길을 멈춰 선 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였다. 본문을 외워서가 아니라, 그 단어 하나하나가 오후의 햇살처럼 천천히 내려앉았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누가복음 10:33-34
비유를 다시 읽어 보면, 사마리아인이 한 일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동작의 연속이다. 첫째, 그는 본다. 둘째, 불쌍히 여긴다. 셋째, 가까이 간다. 넷째, 상처를 싸맨다. 다섯째, 자기 짐승에 태운다. 여섯째, 주막으로 데려가 돌본다. 일곱째, 다음 날 자기 돈을 내어 맡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결국 첫 번째 동작, 곧 “보았다”에서부터 시작된다. 본문은 제사장과 레위인도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보고서 길을 건너 비켜 갔다. 같은 풍경 앞에서 사마리아인은 멈췄고, 그 둘은 지나갔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본문은 사마리아인이 무엇을 더 알고 있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를 “여행하는 중”인 사람으로 묘사한다. 즉, 그도 자기 일정이 있었고, 자기 도착해야 할 곳이 있었다. 다만 그는 자기 일정 안에 한 사람의 자리를 만들 줄 알았다. 일정을 깨지 않으면서도 일정을 멈춰 세울 줄 알았다. 그것이 그가 한 “일”의 본질이었다.

나는 오늘 약국 앞에서 할머니를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은, 보지 않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마리아인이 묻는 질문은 어쩌면 “당신은 누구를 도왔는가”가 아니라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그리고 본 뒤에 어떻게 했는가”일 것이다. 시선이 회심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손도 발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본문이 끝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이와 같이”의 시작은 늘 보는 자리에 머무르는 일이다.
주일 오후의 만남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오 분의 운전, 무거운 장바구니 두 개, 짧은 인사. 그러나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거는 순간에는, 내가 도운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굽은 등 너머에서 누군가가 내 시선을 가만히 들어 올려, 오늘 하루의 결을 바꾸어 놓으셨다. 다음 약속 장소까지 가는 길에 신호가 두 번 더 길어졌지만, 그 길은 이상하리만큼 조급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식탁에 앉을 때, 식기 한 벌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식탁의 따뜻함은 늘 누군가의 굽은 등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오늘 다시 배운 것 같았다. 좋은 사마리아인은 나에게 영웅적인 친절을 묻지 않으셨다. 다만 오늘 내가 지나친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물으셨다. 그리고 다음 주일 오후, 다시 약국 앞을 지날 때 나는 조금 다른 눈으로 그 자리를 바라볼 것 같다. 보는 자리에 잠시 멈추는 사람, 그것이 오늘 내가 받은 작은 부르심이다.
집에 돌아와 거실 창가에 앉아 잠깐 더 생각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차이를 우리는 흔히 “인격”의 차이로 읽지만, 본문을 다시 보면 그것은 “속도”의 차이이기도 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 일정의 속도 안에서 길을 지나갔고, 사마리아인은 자기 속도를 잠시 내려놓을 줄 알았다. 사실 시간이 부족해서 멈추지 못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마음의 속도가 빠를 때 우리는 보고도 보지 못한다. 일상이 분주한 도시일수록 “느리게 보는 눈”이 필요한 이유다.
또 한 가지, 사마리아인은 비유 안에서 끝내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어떤 사마리아 사람”으로 남는다. 어쩌면 좋은 일은 이름을 남기지 않을 때 더 깊이 남는지도 모른다. 오늘 약국 앞에서 만난 그 할머니께도 나는 이름을 묻지 않았고, 할머니께서도 나의 이름을 묻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동안 같은 시간을 함께 걸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남았다. 누군가의 무거운 짐 한쪽을 잠시 들어드리는 일이 우리의 신앙 안에서 늘 “이름 없는 자리”에 머문다면, 그 자리야말로 가장 복음다운 자리일 것이다.
저녁 무렵 다시 본문을 펼치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율법사의 말 앞에 예수님이 한 가지 질문을 되돌려 놓으신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분의 질문은 “누가 네 이웃이냐”가 아니라 “네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였다. 그 물음 앞에서는 ‘이웃’이라는 단어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온다. 누구를 이웃으로 가질 것인가의 자리에서, 내가 어떤 사람의 이웃으로 살아가는가의 자리로. 그 작은 회전이 오늘 오후 약국 앞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것 같았다. 다음 주, 또 그다음 주에도 나는 같은 자리에 멈춰 설 수 있을까.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오늘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에 작은 불빛이 켜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