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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동행 — 보이지 않는 길을 함께 걷는다는 것


창세기 5장은 대체로 이름과 숫자의 목록이다. 셋의 자손들이 누구를 낳고, 몇 살에 죽었는가를 단조로운 리듬으로 반복한다. 그 단조로운 리듬을 따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한 사람의 이름 앞에서 호흡이 잠시 멈춘다. 에녹이다. 에녹의 자리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한 줄이 더 적혀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리고 또 한 줄.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새벽빛이 스미는 숲 속 오솔길
새벽빛이 스미는 숲 속 오솔길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 창세기 5:24

이 짧은 두 줄이 전하는 무게는 묘하다. 다른 사람들의 생애는 “몇 살에 누구를 낳고 몇 살에 죽었더라”라는 형식으로 마무리된다. 에녹의 생애에는 죽음이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동행”과 “데려가심”이라는 두 단어가 한 사람의 365년을 요약한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묵상을 깊게 만든다. 인생의 길이도, 자손의 수도, 업적의 크기도 아닌, 동행이라는 한 단어가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정의해 버린 것이다.

동행이라는 단어를 한참 들여다본다. 동행은 화려한 사건이 아니다. 동행은 한 방향으로 나란히 걷는 일이다. 빨리 걷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고, 옆에 있는 이의 보폭에 맞추어 걷는 일이다. 에녹과 하나님의 365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우리는 그 구체적인 풍경을 알 수 없다. 다만 그 안에 거룩한 환상이나 천둥 같은 음성보다, 평범한 새벽들과 평범한 저녁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동행은 본래 그런 것이다. 사건의 누적이 아니라 시간의 누적이다.

히브리서 11장은 에녹을 믿음의 사람으로 다시 호명한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 그리고 곧이어 한 구절이 덧붙는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동행과 믿음과 기쁨은 한 묶음이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이고, 그분을 신뢰하며 걷는 모든 걸음 자체가 그분에게 기쁨이 된다. 어쩌면 에녹의 365년은 한 줄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일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분과 어떻게 동행할 수 있는가. 신학적인 답은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답은 일상의 자리에서 의식적으로 그분의 임재를 기억하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자리에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동료에게 인사를 건네는 순간에, 점심 식사 앞에서, 퇴근길의 한 구간에서, 잠자리에 드는 자리에서. 그분이 함께 계심을 잠시잠시 떠올리는 일. 그 떠올림이 모이면 어느 순간 동행이 된다.

동이 트는 들판 위로 비치는 햇살
동이 트는 들판 위로 비치는 햇살

에녹의 시대는 결코 평온한 시대가 아니었다. 창세기 6장은 곧장 노아의 홍수로 이어진다. 인간의 죄악이 가득한 세대였다. 그런 세대 한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했다. 환경이 그를 동행으로 이끈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에 묻히기를 거부한 한 사람의 결단이, 매일의 한 걸음 한 걸음으로 다듬어진 결단이, 그를 동행의 자리로 이끈 것이다. 에녹은 자기 시대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거부는 외침이나 시위의 형태가 아니라, 묵묵히 다른 방향으로 걷는 형태였다.

오늘 우리에게도 시대는 떠들썩하다. 의견은 갈라지고, 정보는 넘쳐나고, 사람은 모든 일에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시대에 한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모든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될지 모르겠다. 한 박자 늦추어 침묵하는 것, 분노 대신 기도로 옮기는 것, 비교 대신 감사로 돌이키는 것. 동행은 본래 다른 보폭을 의미한다. 세상의 보폭이 아니라 그분의 보폭. 빠르지 않고, 늦지도 않은, 그러나 결국 다른 방향을 향한 걸음.

에녹은 셋의 후손 중에서도 평범한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한 사람이 365년 동안 같은 방향을 향해 걸었다. 그 걸음의 누적이 결국 인류 역사 안에서 가장 독특한 한 생애를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한 번의 거대한 결단으로 동행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 다만 매일 작은 결단을 반복할 뿐이다. 오늘 아침 한 줄 기도, 오늘 점심 한 번의 감사, 오늘 밤 한 페이지의 묵상. 그 작은 결단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일생을 동행의 일생으로 빚어 간다.

한 가지 더 곱씹게 되는 대목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본문은 그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그 후 300년을 동행했다고 적는다. 즉 동행은 어린 시절의 결단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자리에서,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깊어졌다는 의미다.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동시에 죽음을 처음 진지하게 마주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다음 세대를 보며 자기 세대의 끝을 가늠하기 시작한다.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이 결심한다. 남은 날들을 누구와 함께 걷겠는가. 에녹의 답은 분명했다.

이 본문은 또한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동행은 늦게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위로다. 우리가 이미 살아온 시간이 짧지 않을 수 있다. 후회의 무게가 클 수도 있다. 그러나 에녹처럼, 어느 한 시점에서 방향을 돌이켜 그분과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면, 그 걸음의 누적이 어떤 일생을 빚어 갈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동행에는 자격 시험이 없다. 출발선도 따로 없다. 다만 오늘 한 발자국, 그분 쪽을 향한 한 발자국이 있을 뿐이다.

창세기 5장의 그 한 줄,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는 문장 앞에서 오늘도 잠시 멈춘다. 그 한 줄의 무게가 마음을 누른다. 동시에 그 한 줄의 따스함이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위대한 사건도 아니고, 화려한 업적도 아니고, 단지 동행이었다는 사실. 그분과 함께 걸었다는 사실 하나가 한 사람의 모든 것이 되었다는 사실. 오늘도 가장 작은 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침 식탁 앞에서 잠시 눈을 감는 것, 출근길의 어느 신호등 앞에서 한 줄 기도를 떠올리는 것, 사무실 책상에 앉아 첫 메일을 열기 전 잠시 호흡을 고르는 것. 이런 작은 멈춤들이 동행의 보폭을 만들어 간다. 에녹이 365년 동안 계속해서 했던 일은 어쩌면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이런 작은 멈춤의 누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적이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그대로 데려가실 만큼의 친밀함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 하루도 그 한 줄 안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한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평범한 보폭으로, 그러나 분명히 같은 방향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