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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침묵


1996년에 작고한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에는 선교를 위해 17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포르투갈 신부 로도리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교 중에 로도리코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묵상합니다. 묵상 속에 용감하고 평온한 그리스도의 얼굴은 언제나 말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정부의 박해로 인해 그는 감옥에 갇히고 배교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로도리코는 용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떠올리며 순교자가 될 각오로 배교를 거부한 후 다시 옥에 갇히고 맙니다.

그날 밤. 로도리코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한 마디를 기다려보지만, 그의 귀에는 온통 동료 죄수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간수들의 코고는 소리와 흡사한 알 수 없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그 이상한 소리가 똥더미에 얼굴을 처박힌 채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신음소리였음을 그는 나중에야 알게 되지요. 그가 배교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고통도 멈출 수 없다는 사실도.

막다른 골목에서 고뇌하던 로도리코는 뜻밖에도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숱한 사람들이 짓밟고 지나간 흙투성이 예수님의 형상 속에서, 너희의 발에 밟힌 내가 누구보다 너의 고통을 안다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제야 그는 똥더미에 처박힌 채 나무에 거꾸로 매달렸던 사람들의 신음 한가운데 그리스도께서 계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침묵한 것이 아니었지요.

우리는 어디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습니까?

그분은 피조물의 고통 저 멀리 안락한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의 음성은 만물의 고통스러운 신음 속에서 들려옵니다. 내가 이웃과 타인의 아픔과 신음소리에 귀를 막으면, 그분도 침묵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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