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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이 그어진 낡은 성경책 — 시간이 새긴 흔적들


책장 깊숙한 곳에 오래된 성경책 한 권이 있습니다. 표지의 금박은 벗겨졌고, 모서리는 손때에 닳아 둥글게 마모되었습니다. 펼치면 갈라진 책등 사이로 세월의 냄새가 배어 나옵니다. 새 성경을 여러 권 들였지만, 이상하게도 손이 자주 가는 것은 늘 이 낡은 한 권입니다. 그 안에는 새 책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시간의 흔적입니다.

펼쳐진 옛 책의 활자를 비추는 은은한 빛

페이지마다 밑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어떤 줄은 자로 잰 듯 반듯하고, 어떤 줄은 급하게 그은 듯 비뚤어져 있습니다. 여백에는 흐릿한 연필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이 말씀 붙들고 견디자.” “20××년 겨울, 눈물로 읽음.” 날짜만 적혀 있는 구절도 있고, 물음표가 커다랗게 그려진 곳도 있습니다. 밑줄 하나하나가 그때의 나를, 그때의 계절을 고스란히 붙들고 있습니다.

밑줄은 그 시절의 지도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성경 구절이라도 시기마다 다른 줄이 그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축복과 형통을 약속하는 구절에 힘주어 밑줄을 그었습니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마음이 그 줄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펼쳐 보면,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구절이 새삼 눈에 들어옵니다. 고난 중의 위로, 기다림의 인내, 연약함을 끌어안는 은혜의 말씀들입니다.

밑줄은 그러니까 일종의 지도입니다. 내가 어느 계절을 통과해 왔는지, 그때 무엇에 목말라했고 무엇으로 버텼는지를 보여 주는 지도. 성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앞에 앉은 나는 계속 변해 왔습니다. 같은 말씀이 시기마다 다르게 읽히는 것은, 말씀이 그만큼 깊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그만큼 자라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시편 119:105

이 구절 옆에는 유독 진한 밑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등불은 멀리까지 비추지 않습니다. 딱 한 걸음 앞을 밝힐 뿐입니다. 젊은 날에는 그것이 답답했습니다. 왜 저 멀리까지 환하게 보여 주지 않으실까.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한 걸음만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은혜였다는 것을. 만약 앞길이 전부 보였다면, 그 무게에 짓눌려 한 발도 떼지 못했을 것입니다. 등불은 딱 필요한 만큼만 밝힙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걸음 내디디면, 그만큼 다시 앞이 밝아집니다.

탁자 위에 펼쳐진 낡은 책과 열쇠

낡아 간다는 것의 의미

물건이 낡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아쉬워합니다. 새것의 반질반질한 표면이 긁히고 바래는 것을 아까워합니다. 그러나 어떤 낡음은 훈장과도 같습니다. 오래 신어 발에 꼭 맞게 길든 신발, 손에 익어 편안해진 연장, 그리고 손때 묻은 성경책. 이런 물건들의 낡음은 ‘함께 지나온 시간’의 증거입니다. 낡았다는 것은 곧 오래 사랑받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책이 낡아 간다는 것은 그것이 책장에 장식으로 꽂혀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펼쳐졌고, 읽혔고, 눈물에 젖었고, 손에 들려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신앙이 자란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반짝이는 새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고 닳아 가며 나만의 결을 만들어 가는 것 말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 시편 119:11

마음에 말씀을 둔다는 것은, 결국 그 말씀을 여러 번 읽어 마음에 새기는 일입니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그 새김의 작은 몸짓입니다. 다시 돌아와 읽겠다는 약속이고, 이 구절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렇게 새겨진 말씀은 위기의 순간에 불쑥 떠오릅니다. 아무 책도 펼칠 수 없는 병상에서, 캄캄한 새벽의 불면 속에서, 마음에 새겨 둔 한 구절이 등불이 되어 줍니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흔적

언젠가 이 낡은 성경책은 누군가의 손에 남겨질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은 밑줄과 메모를 따라, 먼저 이 길을 걸어간 한 사람의 신앙을 읽어 낼 것입니다. 어디서 흔들렸고, 어디서 붙들렸으며, 무엇으로 견뎠는지를 말입니다. 우리가 남기는 가장 값진 유산은 재산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흔적일지 모릅니다.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씨름한 한 생애의 기록.

오늘 밤, 오래 펼치지 않았던 성경책을 다시 꺼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예전에 그어 둔 밑줄을 따라가다 보면, 잊고 있던 그 시절의 나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계절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한 구절 한 구절이 등불이 되어 나를 이끌어 왔다는 것을. 낡은 성경책의 밑줄은, 결국 은혜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발자국입니다.

여백에 적힌 기도들

밑줄만큼이나 마음을 붙드는 것은 여백의 메모입니다. 활자로 인쇄된 말씀 곁에, 손글씨로 적힌 짧은 기도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간구였고, 어떤 것은 감사였으며, 어떤 것은 그저 한숨 같은 한 문장이었습니다. “왜입니까”라고만 적힌 여백도 있습니다. 그날의 나는 답을 얻지 못한 채 그 물음표를 남겨 두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그 페이지를 펼치면, 놀랍게도 그 물음 곁에 언젠가 조용히 덧붙인 답이 함께 적혀 있곤 합니다. 하나님은 늦게 오시는 듯해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낡은 성경의 여백이 증언합니다.

이것이 오래 읽은 성경책의 신비입니다. 그것은 단지 읽는 책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의 오랜 대화가 축적된 장소가 됩니다. 인쇄된 말씀은 하나님의 편지이고, 여백의 메모는 그에 대한 나의 답장입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 왕복 서신이 다시 살아납니다.

흔적을 두려워하지 말라

깨끗하게만 보존된 책은 아름답지만, 아무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인생은 없습니다. 실패의 자국, 후회의 접힌 모서리, 눈물로 번진 자리들이 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흔적들이야말로 우리가 실제로 살아왔다는 증거이며, 은혜가 개입해 온 자리이기도 합니다.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지워야 할 오점이 아니라, 읽어 내야 할 이야기입니다.

낡은 성경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언젠가 내 삶도 이 책처럼 누군가에게 읽힐 것이라고. 그때 나의 밑줄과 메모가, 뒤따라오는 이에게 작은 등불이 되기를. 그리고 오늘도 한 구절 위에 조심스레 밑줄을 긋습니다. 오늘이라는 계절을, 오늘의 나를, 이 페이지에 새겨 두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