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 가면 하루에도 수십 번 듣는 말이 있습니다. “샬롬.” 만날 때도 샬롬, 헤어질 때도 샬롬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대개 ‘평화’ 또는 ‘평안’으로 옮깁니다.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많이 모자란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은 우리가 아는 ‘평화’보다 훨씬 크고 넓고 구체적인 말입니다. 오늘은 이 단어의 뿌리를 함께 파 보려 합니다. 단어 하나를 제대로 알면, 성경 여러 장이 한꺼번에 밝아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근이 말해 주는 것: ‘온전함’과 ‘갚음’
샬롬의 어근은 히브리어 세 자음 ש-ל-ם (샬렘)입니다. 이 어근의 기본 뜻은 ‘평화롭다’가 아닙니다. 온전하다, 완전하다, 흠이 없다, 다 채워져 있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동사 ‘쉴렘(שִׁלֵּם)’의 뜻입니다. 이 동사는 ‘갚다, 배상하다, 값을 치르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출애굽기의 배상 규정을 읽어 보면 이 단어가 계속 등장합니다. 남의 소를 다치게 했으면 갚아야 하고, 남의 밭을 태웠으면 배상해야 합니다.
왜 ‘온전함’과 ‘갚음’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을까요? 답은 단순하고 아름답습니다. 배상이란, 깨져서 빠져나간 자리를 원래대로 다시 채워 넣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가 빠진 그릇을 메워 다시 온전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샬롬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므로 샬롬은 ‘아무 일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빠진 조각이 다 제자리에 채워진 상태’입니다. 결핍이 없는 것, 어긋난 것이 바로잡힌 것,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마땅한 자리에 있는 것.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우리말 ‘평화’나 영어 ‘peace’는 대체로 소극적인 정의를 갖습니다. 갈등의 부재, 전쟁의 부재, 소음의 부재. 무언가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샬롬은 적극적입니다. 무언가가 가득 있는 상태입니다. 몸이 건강하고, 관계가 바르고, 공동체에 정의가 서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사이가 바로 서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함께 있을 때 성경은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안부를 물을 때 “샬롬이 어떠하냐”라고 묻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며 한 말도 그렇습니다. 네 형들의 샬롬과 양 떼의 샬롬을 보고 오라. 우리말로는 “안부를 알아보라”로 옮기지만, 원문은 이렇게 묻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에게 빠진 것은 없는지, 다 온전한지 보고 오라.
사무엘하에는 조금 서늘한 용례도 있습니다. 다윗이 전령에게 “전쟁의 샬롬”을 묻는 장면입니다. 전쟁이 잘 되어 가는지를 물으면서 ‘샬롬’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평화라는 말로는 도저히 옮겨지지 않는, ‘일이 온전히 되어 가느냐’는 뜻입니다.
샬롬은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온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축복, 아론의 축도를 봅시다. 이 축복의 마지막에 샬롬이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 민수기 6:24-26
순서를 눈여겨보십시오. 샬롬은 맨 앞이 아니라 맨 끝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즉 하나님이 얼굴을 돌려 나를 바라보시는 것이 먼저이고, 샬롬은 그 결과로 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샬롬은 상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관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얼굴을 드셨다는 사실, 그것이 샬롬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그래서 형편이 좋아도 샬롬이 없을 수 있고, 형편이 나빠도 샬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깨진 샬롬, 그리고 값을 치르신 분
창세기의 창조는 샬롬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기 자신, 사람과 피조 세계. 이 네 겹의 관계가 모두 온전했습니다.
죄는 바로 이 샬롬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깨진 것은 관계였기에, 그 결과도 관계로 나타났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고, 서로를 탓했고, 땅은 가시덤불을 냈습니다. 조각이 빠져나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샬롬은 어떻게 회복됩니까. 어근이 이미 답을 알려 주었습니다. 누군가 값을 갚아야(쉴렘) 합니다. 빠져나간 자리를 채워 넣을 대가가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오실 분을 이렇게 부릅니다. “평강의 왕”, 곧 샬롬의 왕. 그리고 신약은 그분이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선포합니다. 골로새서의 표현대로, 그분이 값을 치르심으로 만물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샬롬의 어근이 ‘갚다’였다는 사실이,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온전히 이해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평안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날 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요한복음 14:27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부입니다. 문제가 사라지면 오고, 문제가 오면 사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샬롬은 폭풍 속에서도 가능한 평안입니다. 상황이 잔잔해져서가 아니라, 배 안에 그분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샬롬이 머무는 자리, 안식
샬롬과 나란히 놓고 보아야 할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안식, 곧 샤바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하신 일은 ‘멈춤’이었습니다. 더 만드실 수 있었는데도 멈추셨습니다. 지치셔서가 아닙니다. 왜 멈추셨습니까. 다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더 채워 넣을 조각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게으름이 아니라 샬롬의 선언입니다. 오늘 내가 손을 멈추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고백이고, 내 인생의 빠진 조각을 채우시는 분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쉬지 못하는 사람에게 샬롬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도 자기 힘으로 전부 채워 넣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손을 멈추는 순간 무언가 무너질 것 같아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채우시는 분을 신뢰할 때에야 비로소 손을 놓을 수 있고, 손을 놓을 수 있을 때에야 샬롬이 찾아옵니다.
샬롬은 받는 것이자, 만드는 것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곧 샬롬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샬롬은 가만히 앉아 누리는 감정이 아닙니다. 깨진 자리를 찾아가 채워 넣는 노동입니다. 어긋난 관계를 이어 붙이고, 빠진 사람의 몫을 채워 주고, 부서진 곳에 손을 대는 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을 치르며 샬롬을 만들어 주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에게 값을 치르며 샬롬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샬롬” 하고 인사한다면, 그 말의 무게를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단지 “안녕하세요”가 아닙니다. 당신의 삶에 빠진 조각이 하나도 없기를,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기를,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 얼굴을 드시기를. 그런 큰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