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창을 열면 유월의 공기가 들어온다. 아직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지만 습기가 조금씩 달라붙는 그 계절의 입구. 온 세상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소리, 어딘가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저 멀리 도시의 소음들이 새벽의 정적 속에 스며든다. 어제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성경을 펼쳤을 때, 손이 닿은 곳이 시편 46편이었다.
처음 읽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수십 번은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는 방식이 달랐고, 마음에 안착하는 방식이 달랐다. 그것이 성경의 신비인지도 모른다. 같은 말씀이지만, 읽는 자의 자리가 다르면 그 말씀도 다른 면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 시편 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첫 절을 읽는 순간, 어떤 고요함이 내 안에 내려앉는다. 설명하기 어려운 그 감각이다. 바깥은 여전히 시끄럽고 마음 한켠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걱정들이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뭔가 단단한 것이 받쳐준다는 느낌. 마치 흔들리는 땅 위에서 발을 디딜 수 있는 바위를 만난 것처럼.
시편 46편을 쓴 고라 자손들은 분명 평온한 시절에 이 노래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시는 산이 흔들리고 바다가 뒤집히는 극한의 상황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이것은 문학적 과장이 아니다. 삶이 실제로 뒤집히는 순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고백이다.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 앞에 섰을 때, 혹은 나라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던 그 시절에, 그들은 노래로 이 진실을 고백했다. 하나님은 피난처시라고.
피난처의 의미
피난처. 이 단어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현대어로는 단순히 위험을 피하는 장소처럼 들릴 수 있다. 어딘가 숨는 곳, 임시로 몸을 피하는 공간. 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에서 ‘마흐세'(מַחְסֶה)는 단순한 피신처가 아니다. 그것은 신뢰와 확신의 대상이다. ‘내가 전적으로 의탁할 수 있는 분’이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그러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무너져도, 나는 내 무게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라고. 이것은 단순한 위안의 언어가 아니다. 신학적으로 단단한 고백이다. 천지가 흔들려도 변하지 않는 분에 대한 신뢰, 그것이 피난처의 뜻이다.
나는 종종 삶의 무게를 혼자 지려고 한다. 이것이 성숙한 태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감당하고, 스스로 해결하고, 스스로 버텨내는 것. 그런데 시편은 조용히 말한다. 진정한 피난처는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피난처로 내어주셨다고. 그분께로 오는 것이 도망이 아니라 가장 용감한 선택이라고.

성 안을 흐르는 강
시편 46편의 중심부에는 아름다운 강이 하나 흐른다. “한 강이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이 강은 예루살렘 성 안을 흐르는 물이다. 성 밖에서는 열방이 흔들리고 나라들이 이동하지만, 성 안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잔잔한 강이 흐른다. 그 강가에 서 있으면 고요하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그렇다. 세상이 아무리 소란해도, 그분이 계신 곳에는 강이 흐른다. 잔잔하고, 맑고, 멈추지 않는 강. 그 강물은 어떤 전쟁도, 어떤 흔들림도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므로 성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시편은 말한다.
나는 그 강가에 자주 가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급하다는 이유로, 이 문제 저 문제를 혼자 붙들고 씨름하면서 정작 그 강가에 앉아 물 소리를 듣는 시간을 아껴왔다. 아침 묵상이 습관처럼 이루어지는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은 그저 형식으로 흘려버린다. 그러나 시편은 조용히 권한다. 와서, 보라고. 멈추고, 알라고.
가만히 있어
46편의 마지막 부분에 이 구절이 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이 말이 오늘 아침 내 마음에 가장 크게 울린다. 가만히 있어. 고요히 있어. 멈추어라. Be still.
우리는 가만히 있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무언가를 하고, 어딘가로 가고, 뭔가를 증명하고, 끊임없이 움직여야 존재가 확인되는 것 같은 시대. SNS의 피드는 멈추지 않고, 알림은 쉼 없이 울리고,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달리고 있다. 그 안에서 시편은 말한다. 가만히 있으라고.
가만히 있다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신뢰하는 행위다. 내가 해결하지 않아도 그분이 하실 수 있다는 믿음. 내가 없어도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 지혜. 내 몫보다 더 크신 분이 계신다는 고백. 가만히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볼 수 있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고요함은 수동적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능동적인 신뢰의 자세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내 손에서 힘을 빼고, 그분의 손에 상황을 맡기는 것. 그 행위가 ‘가만히 있음’이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다.
오늘 아침의 다짐
유월의 아침, 시편 46편을 덮으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오늘 하루, 조금 더 가만히 있어보겠다고. 해결해야 할 것들을 손에서 잠시 내려놓고, 그 강가에 앉아 물 소리를 듣겠다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내 이성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분을 신뢰하는 연습을 하겠다고.
피난처는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께 마음을 돌이키는 그 순간에, 강이 흐른다. 고요하고, 맑고, 멈추지 않는 강. 그 강가에서 마음이 쉰다. 지쳐있던 것들이 물에 씻긴다. 그리고 다시 하루를 시작할 힘이 생긴다.
오늘도 그 강가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심을 믿으면서. 산이 흔들려도, 바다가 뒤집혀도, 그 강은 흐른다는 것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