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사무실은 의외로 시끄럽지 않다. 점심을 먹으러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띄엄띄엄 남고, 창밖 하늘은 가장 뜨거운 빛을 내려놓는 중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식사 대신 의자를 조금 뒤로 밀고, 두 손을 키보드 위에 잠깐 얹는다. 일을 멈춘 손가락이 어색하게 떨린다. 일하지 않을 때의 손이 이렇게 낯설었던가.
새벽 큐티는 자주 놓쳤다. 알람을 끄는 손이 말씀을 펴는 손보다 먼저 움직였고, 출근길 지하철에서 펼쳐도 본문은 자꾸 미끄러져 내렸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시간을 옮겨 보았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누구도 찾지 않는 정오 12시 10분, 책상 위에 작은 성경을 펼쳐 놓고 다섯 줄만 읽기로 한 것이다. 다섯 줄. 욕심을 줄여 본 것이다.
일곱 번 찬양한다는 사람의 시간표
다윗이 시편에서 고백한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처음 만났을 때, 솔직히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회의가 줄지어 잡혀 있고 메일이 십 분에 한 통씩 들어오는 하루에 일곱 번이 가능할까. 그러나 다섯 줄을 펴 놓고 읽은 정오의 어느 날, 비로소 그 숫자가 다르게 다가왔다. 일곱 번은 양이 아니라 자세였다. 시간을 끊어내는 자세, 손을 멈추는 자세, 잠시 다른 음성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자세.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 시편 119:164

다섯 줄은 적지만, 다섯 줄이 흘러가는 이 분 남짓의 시간은 적지 않다. 키보드 위에서 떨리던 손가락은 점차 잠잠해지고, 오전 내내 어깨에 걸려 있던 긴장이 한 번 풀린다. 마음 어딘가에 작은 틈이 생긴다. 그 틈으로 정확히 무엇이 들어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어오는 것은 분명히 있다.
가장 시끄러울 때 가장 작은 목소리
아이러니하게도 정오는 하루 중 가장 시끄러운 시간이다. 점심 약속, 미루어 둔 답장, 오후 회의 자료. 머릿속이 가장 분주한 시간에 가장 작은 목소리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어쩐지 비효율처럼 보인다. 그러나 비효율이라 부르기엔 그 짧은 멈춤이 오후의 결을 다르게 만든다. 멈춰 본 사람의 오후와 멈추지 못한 사람의 오후는 같은 시간이라도 같지 않다.
오늘은 시편 23편을 펴고, 다섯 줄만 읽기로 한 약속대로 1절부터 5절까지만 읽었다. 그리고 4절에서 멈춰 섰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 해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라는 그 익숙한 문장이 오늘은 익숙하지 않았다. 사망의 골짜기까지는 가지 않은 평범한 하루지만, 작은 골짜기들은 매일 있었다. 답장을 미룬 메일 하나, 들어주지 못한 동료의 한숨, 어머니에게 끊어 둔 전화. 그것들도 어쩌면 작은 골짜기였다.
정오의 다섯 줄이 남기고 가는 것

큐티가 끝나면 즉시 일이 다시 시작된다. 회의 알람이 울리고, 모니터에는 답해야 할 메시지가 다섯 개쯤 쌓여 있다. 그러나 다섯 줄을 통과한 마음은 그 메시지를 여는 손길이 조금 다르다. 더 따뜻해진 것도, 더 거룩해진 것도 아니다. 다만 한 박자 늦게 반응한다. 한 박자 늦은 반응은 종종 가장 좋은 반응이 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 시편 46:10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정오의 자리에서는 명령이 아니라 초대처럼 들린다. 가만히 있어 본 사람만이 일할 수 있다는 듯이, 멈춰 본 손만이 다시 부드럽게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다는 듯이.
새벽이 큐티의 정석이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정석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사례에 가까울지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새벽이 가장 진실한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정오가, 또 누군가에게는 잠들기 직전 침대맡이 그렇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이름이 아니라 멈춤의 자리다. 그 자리에서 다섯 줄을 견뎌 내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일.
오늘의 정오는 짧았다. 다섯 줄을 읽고, 한 줄에 멈추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짧음 안에서 분명히 무엇이 옮겨졌다. 무엇이 옮겨졌는지를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설명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어지기 위해 일어난다. 정오의 다섯 줄이 그러하다.
내일도 같은 자리에 앉을 것이다. 같은 책상, 같은 의자, 비슷한 양의 메일. 그러나 12시 10분이 되면 의자를 조금 뒤로 밀고, 다시 다섯 줄을 펼 것이다. 일곱 번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번이라도 멈춰 본 사람의 하루는, 멈춰 본 적 없는 하루보다 한 박자 더 깊다는 것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다섯 줄 너머 : 다시 시작되는 오후
다섯 줄을 읽고 일어선 자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보통 동료들이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그들의 얼굴에는 막 풀어 둔 긴장이 묻어 있고, 누군가는 어제의 회의에서 정리되지 못한 한 줄을 들고 다가온다. 정오의 다섯 줄을 읽지 않은 날의 나는 그 한 줄에 즉시 반응했다. 빠르게 답했고, 즉시 결론을 냈으며, 종종 그 결론은 다음 날 다시 정정해야 했다. 그러나 다섯 줄을 통과한 날의 나는 한 박자 늦게 듣는다. 그 한 박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동료는 알 리 없지만, 듣는 사람은 안다. 자기 말이 충분히 들렸는지 아닌지를 사람은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정오의 큐티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다섯 줄은 내가 받지만, 그 다섯 줄이 만든 한 박자는 내 옆 자리의 동료가 받는다. 모르는 사이에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길은 없지만, 분명히 누군가는 받는다. 신앙이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것이라는 옛 명제가, 정오의 책상 앞에서 작은 형태로 매번 다시 입증된다.
큐티의 자리는 자주 옮겨도 좋다
큐티의 시간을 한 번 옮겨 보고 알게 된 사실이 또 있다. 시간을 옮기는 일이 신앙의 약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새벽이 신앙의 정석이라는 옛 가르침은 분명히 한 시대의 진실이지만, 일하는 자의 시대에 맞는 다른 자리가 또 있을 수 있다.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도망이 아니라 적응이다. 자리를 옮길 줄 아는 신앙이 자리에 매달리는 신앙보다 더 오래 간다는 것을, 정오의 책상은 매일 작은 목소리로 알려준다.
오늘의 다섯 줄은 잠시 후 잊힐 것이다. 그러나 잊힌다는 것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말씀은 외워지기보다 흡수된다. 흡수된 말씀은 기억의 모양을 띠지 않고 행동의 결을 띤다. 메일에 답하는 손끝, 회의에서 듣는 자세, 동료를 부르는 음성의 높이. 그 자리에 정오의 다섯 줄이 조용히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