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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라는 말이 닳지 않으려면 — 익숙해진 단어를 다시 읽는 시간

sangkist

‘은혜’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던 날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단어가 더는 새롭지 않게 된 날은 분명히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은혜로 살아간다’는 말을 인사처럼, 서명처럼, 그저 입에 익숙해진 마무리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단어가 닳는다는 것은 신앙이 옅어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다만 가장 중요한 단어일수록 가장 빠르게 닳는다. 너무 자주 만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닳은 단어를 한 번 천천히 다시 발음해 보고 싶었다. 은혜. 다섯 글자의 자모를 또박또박 쪼개 발음하면, 묘하게 어색해진다. 어색함이 좋은 신호일 때가 있다. 너무 매끄럽게 흘러가던 것이 한순간 걸리는 것은, 비로소 우리가 그것을 다시 들여다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받을 자격 없음, 그러나 주어짐

신학 사전의 정의는 단순하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진 호의. 그러나 이 단순한 정의가 우리에게 어려운 까닭은, 우리 사회가 자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격증, 학력, 연차, 성과, 평판. 우리는 자격으로 호명되고 자격으로 입장 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시대 안에서 자격 없음을 전제로 하는 단어는 거의 외계어처럼 들린다. 자격 없는 사람에게 자격 있는 자리가 주어진다는 일을 우리는 자주 의심한다. 의심은 본능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에베소서 2:8

은혜라는 단어를 다시 묵상하는 어둑한 서재의 한 자리

그래서 은혜는 끊임없이 다시 설명되어야 하는 단어다. 한 번 설명되고 끝나는 단어가 아니라, 인생의 단계마다 다른 깊이로 다시 발견되어야 하는 단어. 십대에 들었던 은혜와 삼십대에 듣는 은혜와 부모를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듣는 은혜는 같은 다섯 글자라 해도 결코 같지 않다.

‘더 잘하면 더 사랑받을 것이다’라는 오래된 거짓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는 자주 자격의 언어로 미끄러진다. 더 깊이 기도하면, 더 자주 모이면, 더 많이 봉사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실 거라는 작은 거짓말이 마음 안쪽에 쌓인다. 그 거짓말은 들킬 만큼 노골적이지 않아서 더 위험하다. 외형상 신앙은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내면은 점점 더 자격의 논리로 단단해진다.

은혜를 다시 읽는 일은 그 자격의 단단함에 작은 균열을 내는 일이다. 잘하지 못한 날에도 사랑받았다는 것, 더 깊이 기도하지 못한 새벽에도 응답이 있었다는 것, 봉사의 자리에서 빠진 주일에도 그분의 시선이 거두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자주 당황한다. 당황은 좋은 신호다. 자격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비로소 마주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닳지 않게 하는 단 하나의 방법

황혼의 빛이 드리운 신앙 서재 한 켠의 평온

은혜라는 단어가 닳지 않게 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자주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주 다시 보는 것이다. 같은 단어 앞에서 여러 번 멈춰 보는 것. 멈춤은 단어를 새것으로 만들지 않지만, 단어 앞에 선 사람을 새것으로 만든다. 은혜의 의미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는 사람의 깊이가 매번 달라진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고린도전서 15:10

바울의 이 고백을 신학 강의의 결론처럼 듣지 말고, 한 노년의 사람이 흰 머리를 만지며 천천히 내쉬는 한숨처럼 들어보자. 더 많이 수고했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문장은, 자격을 사랑하던 한 사람이 자격이 아닌 다른 자리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했다는 고백이다. 그 발견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에 걸쳐 매번 다시 일어난 발견이었을 것이다.

다시 천천히, 은혜

오늘 저녁 기도를 마치며 한 단어만 천천히 발음해 본다. 은. 혜. 한 글자씩 분리해 발음하면 어색하지만, 그 어색함 속에서 단어는 다시 살아난다.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자격, 받을 만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진 사랑, 닳지 않는 척하는 단어가 아니라 닳지 않도록 매일 다시 닦이는 단어. 그것이 신학 사전 안의 정의가 아니라 내 식탁 위에 놓인 정의가 될 때, 그 다섯 글자는 비로소 살아 있는 단어가 된다.

오랜 단어일수록 자주 다시 읽혀야 한다. 가장 익숙한 단어가 가장 중요한 단어인 경우는 의외로 흔하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흘려보낸 단어들 안에 우리가 가장 오래 살아온 진실이 잠들어 있다.

은혜와 책임 사이

은혜라는 단어가 닳기 시작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책임의 언어와 은혜의 언어를 우리가 자주 혼동하기 때문이다. ‘은혜로 살아간다’는 고백을 ‘책임에서 면제되었다’는 말로 들리는 자리가 종종 있다. 그러나 신학의 오랜 전통은 그 둘을 분리하지 않았다. 은혜는 사람에게서 책임을 빼앗아 가지 않는다. 오히려 자격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위에서, 책임은 더 자유롭고 더 가벼운 것이 된다. 자기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책임이 아니라, 받은 사랑에 응답하기 위한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의외로 일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책임은 사람을 자주 지치게 하고, 결과 앞에서 무너뜨린다. 응답으로서의 책임은 결과를 견디게 하고, 실패한 자리에서도 다시 일어서게 한다. 같은 이름의 책임이지만, 그 뿌리가 다르면 열매도 다르다. 닳지 않은 은혜는, 닳지 않은 책임을 함께 빚어낸다.

다른 사람의 은혜를 견디는 법

은혜라는 단어가 가장 시험에 드는 자리는, 의외로 다른 사람의 은혜 앞에서다. 내가 받은 은혜는 단지 받기만 하면 되지만,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는 종종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자격 있는 자리에 앉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항의한다. 그 항의의 깊은 자리에 우리가 사실은 자격의 논리에 깊이 매여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른 사람의 은혜를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은혜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 일꾼의 이야기가 그토록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같은 품삯을 받는 장면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나 그 비유의 진짜 무서움은 품삯의 평등이 아니라, 자격의 논리를 깨뜨리는 한 주인의 시선이다. 그 시선을 견디는 일이 신앙의 한 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