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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화분과 아직 자라지 않은 기도 — 봄 끝자락 영성 일기

sangkist

오월의 베란다 한구석에는 작은 토분 하나가 있다. 지난 가을에 친구가 챙겨 준 씨앗을 묻은 화분이다. 흙은 잘 다져 두었고 물도 잊지 않고 주었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로 옮겨도 보았다. 그러나 봄이 다 가도록 그 화분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한 줌의 떡잎도 나지 않은 흙은, 묘하게 평온한 얼굴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처음에는 실망했다. 다음에는 의심했다. 씨앗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흙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너무 자주 물을 주어 썩혀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며칠을 들여다보고 의심해도 빈 화분은 답하지 않았다. 식물은 침묵을 잘 안다. 침묵 외에 다른 언어를 가지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라지 못한 기도들의 목록

화분 앞에 앉아 있던 어느 저녁, 나는 자라지 못한 기도들의 목록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회복을 위해 일 년 가까이 드린 기도, 가족의 화해를 위해 매일 한 줄씩 적어 둔 기도, 아주 오래된 친구의 신앙을 위해 묵묵히 묻어 두었던 기도. 어떤 기도는 응답되었고, 어떤 기도는 변형되어 응답되었으며, 어떤 기도는 응답이라는 단어가 어색할 만큼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빈 화분과 자라지 않은 기도는 닮아 있다. 둘 다 정성을 들였고, 둘 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 중일 가능성이 있고, 둘 다 우리에게는 침묵으로 답한다. 그러나 둘의 결정적인 공통점은 따로 있다. 자라지 않은 것이 곧 죽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햇살이 비치는 흙과 자라지 못한 씨앗을 담은 화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야고보서 1:4

흙 아래의 시간

씨앗을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흙 위에 떡잎이 올라오기까지 흙 아래에서는 작은 일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껍질이 부풀고, 한 가닥 가는 뿌리가 미세하게 방향을 정하고, 그 뿌리가 어둠 속에서 물 한 방울을 향해 천천히 기울어진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야 떡잎은 비로소 흙을 밀어내고 빛을 만난다. 우리는 떡잎만 본다. 흙 아래는 보지 못한다.

기도도 그렇다. 응답이라는 떡잎이 올라오기 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엇이 천천히 일어나고 있다. 마음의 어떤 굳은 부분이 부드러워지고, 미워하던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흐려지며, 닫혀 있던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일어선다.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보지 못한 채 떡잎만 기다리다 자주 지친다. 그리고 너무 빠르게 죽었다고 단정한다.

씨앗이 결정하지 않는 시간

저녁 그림자가 드리운 베란다의 정물과 영성 일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씨앗은 자기가 자랄 시점을 결정하지 않는다. 흙도 결정하지 않고, 물도 결정하지 않으며, 화분 주인도 결정할 수 없다. 자랄 시간은 자라는 것의 안쪽에서, 또는 그 너머에서 결정된다. 우리는 그 결정을 기다리는 위치에 있을 뿐이다. 기다림은 무능이 아니다. 기다림은 가장 정직한 자리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 시편 27:14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 사이에 기다리라는 말이 들어가는 시편의 문장이 오늘은 다르게 들린다. 기다림은 강함의 반대말이 아니라, 강함의 다른 이름이라는 듯이. 자라지 않은 화분 앞에서 화내지 않는 일은 의외로 강한 일이고, 자라지 않은 기도 앞에서 떠나지 않는 일은 더 강한 일이다.

봄 끝자락의 작은 결심

오늘은 그 화분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다른 씨앗으로 갈아엎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그 안에서 이미 무엇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가능성을, 한 번 더 존중해 주기로 했다. 가능성에 너무 빨리 사형 선고를 내리는 일이 우리 시대의 가장 흔한 폭력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라지 않은 기도들에게도 같은 마음을 주기로 한다. 응답되지 않은 것을 응답되지 못한 것으로 부르지 않기로 한다. 어쩌면 응답은 다른 형태로 이미 도착해 있을 수도, 어쩌면 더 깊은 자리에서 천천히 진행 중일 수도, 어쩌면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의 인생에서 이미 떡잎을 내고 있을 수도 있다. 떡잎의 자리는 내가 결정하지 않는다.

봄이 다 가는 자리에서, 빈 화분과 함께 한참을 앉아 있었다. 햇볕이 화분 가장자리에 길쭉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그림자는 빛이 있다는 증거였다. 자라지 않았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작고 단단한 사실이, 오늘 저녁의 영성 일기에 한 줄 더해진다.

지연된 응답이라는 또 다른 응답

응답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자주 협소하게 쓴다. 기도한 그대로의 모양으로 결과가 도착해야 응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앙의 오래된 사람들은 응답을 더 넓은 단어로 사용했다. 지연된 응답도 응답이고, 변형된 응답도 응답이며, 거절도 어떤 의미에서는 응답이다. 응답의 사전이 넓어지면 빈 화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다르게 다가온다. 지금 이 침묵도 어떤 응답의 한 형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마음 한 켠을 조용히 따뜻하게 한다.

그렇게 보면 자라지 않은 화분은 사실 한 가지 응답을 이미 주고 있다. ‘아직 아니다’라는 응답. 영적인 인내의 깊이는, 바로 그 ‘아직 아니다’를 견디는 자리에서 자란다. 떡잎이 올라오는 화분은 누구나 보살필 수 있다. 자라지 않은 화분을 그대로 두는 일은, 다른 종류의 사랑을 요구한다. 그 사랑은 보살핌이라기보다 동행에 가깝다. 자라든 자라지 않든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일.

씨앗을 묻은 손의 자리

친구의 씨앗을 처음 심던 가을 저녁이 떠오른다. 친구는 화분을 건네주며 말했다. 자라지 않을 수도 있다고, 자라더라도 모양이 다를 수 있다고, 그러니 너무 기대하지는 말되 너무 빨리 포기하지도 말라고. 그 말이 그날은 평범한 농담처럼 들렸지만, 빈 화분 앞에 앉은 오늘 저녁에는 작은 잠언처럼 들린다. 너무 기대하지 않되 너무 빨리 포기하지 않는 자리. 그 자리가 사실은 신앙의 자리인지도 모른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베란다 창문에 작은 창틀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까지, 나는 빈 화분 옆에 머물렀다. 자라지 않은 것 옆에 머무르는 일은 의외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 자라지 않음에 무뎌지지 않는 사람만이, 자랐을 때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 그 기쁨까지의 거리를 견디는 일, 그것이 오늘의 일기에 적히는 마지막 한 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