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마지막 화요일 오후, 약속이 한 시간 미뤄졌다는 짧은 문자 한 통에 마음이 잠깐 비었습니다. 들고 있던 가방을 다시 어깨에 걸치고 평소에는 잘 다니지 않던 골목 한 곳을 천천히 걸어 봅니다. 햇살은 이미 한낮의 강함을 살짝 내려놓고 옆으로 비스듬해진 시간, 빛이 길어진 시간입니다. 그 길어진 빛 끝에, 누군가의 집 담장 옆에 핀 분홍 작약 한 송이가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그 자리에 한 박자 머물렀습니다.

작약은 잠깐 핍니다. 일 년에 길어야 보름 남짓, 짧으면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가장 큰 꽃잎을 내어 놓고 자기 차례를 마칩니다. 화려한 만큼 빨리 흩어지는 꽃이어서, 도시의 가로등 옆이나 누군가의 작은 마당가에서 잠깐 마주칠 때 늘 어딘가 조심스러운 마음이 됩니다. 그 큰 꽃잎이 한 번도 자기 길이를 자랑하지 않은 채, 그저 자기 자리에 그저 피어 있다는 사실이 마음 한 구석을 잠깐 흔듭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6장 28~29절
1.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옷차림이라는 말
예수께서 들의 백합화 이야기를 하실 때, 그 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일평생 들에서 일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그분들에게 매년 보는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그 흔한 풍경을 가리키며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하다’고 말씀하시는 자리에서, 그 자리의 사람들은 잠시 숨이 멎었을 것입니다. 가장 호화로운 영광의 기준이었던 솔로몬의 옷차림을, 길가에 그저 핀 한 송이 들꽃이 능가한다는 선언입니다. 신앙의 미감은 이 한 줄에서 다시 정돈됩니다.
우리의 옷차림은 늘 누군가의 시선을 살피며 결정됩니다. 들꽃의 옷차림은 누군가의 시선을 살피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자리에 피어 있을 뿐인데, 만드신 분의 손길이 그대로 묻어나서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결을 갖게 됩니다. 신앙의 가장 깊은 매무새는, 자기를 꾸미려는 손이 아니라 자기를 만드신 손에 의탁한 자세라는 사실을 들의 한 송이가 한 박자 늦은 햇살 속에서 가만히 보여 줍니다.
2. “염려가 한 자도 더 키우지 못한다”는 말의 잔잔함

같은 본문 27절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잔잔한 반문이 우리 마음의 비명을 한 톤 낮춥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거듭 굴리는 염려가, 한 자의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는 그 사실이 사실은 위로입니다. 굴려도 굴려도 결과를 만들지 못하는 일이라면, 그만 굴려도 된다는 허락이 그 안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을 놓으라는 말이 아니라 염려를 놓으라는 말입니다. 두 가지는 다릅니다. 일은 손의 일이고, 염려는 마음의 일입니다.
오월의 작약 앞에 잠시 서서 그 다섯 글자 — ‘한 자라도 더’ — 를 다시 천천히 읽어 봅니다. 그 다섯 글자가 가방의 무게를 살짝 가볍게 합니다. 한 시간 미뤄진 약속의 빈 공간이, 처음에는 시간의 손실처럼 느껴졌는데, 그 빈 공간 덕분에 골목을 걸을 수 있었고, 골목을 걸은 덕분에 작약 한 송이를 만났고, 작약 한 송이 덕분에 본문의 다섯 글자를 다시 펴 들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자리에서 빈 공간은 자주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3. 자기 자리에 그저 피어 있다는 일
들꽃의 신앙은 단순합니다. 자기를 만드신 분이 정해 주신 자리에 그저 피어 있고, 정해 주신 시간 동안만 피어 있고, 정해 주신 색과 크기 안에서 피어 있습니다. 옆 꽃을 부러워하지도, 자기 꽃잎의 크기를 자랑하지도, 시들 때를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만드신 분의 결을 그대로 살아 냅니다. 우리의 신앙이 들꽃의 신앙과 가장 멀어지는 자리는 자주, ‘내가 누구의 어디만큼이 되어야 한다’는 비교의 자리입니다.
자기 자리에 그저 피어 있다는 일은 단순하지만, 단순함을 살아 내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옆 자리의 더 큰 꽃이, 더 화려한 색이, 더 오래 피는 시간이, 자주 마음을 흔듭니다. 그러나 들꽃 한 송이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알게 됩니다. 그 작은 꽃 한 송이 안에 만드신 분의 솜씨가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도 우리의 자리가 있고, 우리에게도 우리의 결이 있습니다.
4. 오월의 끝, 짧은 산책을 마치며
한 시간이 거의 다 흘렀습니다. 작약 옆을 두 번 더 지나며 그 분홍 한 송이를 한참 더 바라봅니다. 카메라를 꺼내지는 않습니다.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본문의 다섯 글자가 이미 마음 안에 그 한 송이를 정돈해 두었습니다. 약속 장소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는 골목의 끝에서, 햇살이 골목의 시멘트 벽 위에 길게 미끄러져 내립니다. 짧은 산책이 한 편의 작은 묵상이 되어 어깨에 얹힙니다.
오월의 끝자락은 늘 어딘가 서운합니다. 더 오래 피어 있어 줄 것 같던 꽃들이 한꺼번에 다 흩어집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여섯 장의 다섯 글자가 그 서운함을 가만히 다독여 줍니다. 들꽃 한 송이의 짧은 일생이 만드신 분의 솜씨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면, 우리의 짧은 오늘도 만드신 분의 결을 그대로 살아 내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월의 마지막 화요일, 짧은 골목 산책이 한 송이의 묵상으로 끝납니다. 자기 자리에 그저 피어 있는 한 송이로, 오늘 하루를 살아 봅니다.
5. 작약의 시간 — 짧음의 미학과 마침의 단정함
작약을 한 해 동안 가꿔 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꽃잎이 떨어지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작약의 꽃잎은 시들지 않고 그대로 한 잎씩 떨어집니다. 시들음의 과정 없이, 색이 가장 진할 때 그대로 흩어집니다. 짧지만 끝까지 자기 색을 가진 채로 마치는 일. 그 마침이 단정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닿고 싶은 자리도 어쩌면 그런 단정함입니다. 색이 흐려질 때까지 매달리지 않고, 자기 차례가 다하면 한 잎씩 그대로 내려놓는 단정함.
오월의 끝자락에 작약 한 송이를 만난다는 일은 그래서 묘하게도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짧음을 미리 가르쳐 주고, 우리의 색을 미리 정돈해 주고, 우리의 마침을 미리 단정하게 해 주는 한 송이의 짧은 일생. 만드신 분의 결은 가장 짧은 일생 안에도 가장 깊은 묵상을 심어 두십니다. 골목의 끝에서 다시 한 번 그 분홍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본문의 다섯 글자를 마음 안에 한 번 더 곱씹습니다. ‘한 자라도 더.’ 굴려도 굴려도 결과를 만들지 못하는 그 일을, 오늘은 잠시 내려놓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