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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가 접시를 놓았을 때 — 분주함을 내려놓는 자리


어떤 아침에는 접시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아직 어제 저녁의 그릇이 싱크대에 쌓여 있고, 오늘 마셔야 할 커피는 김이 오르지 않은 채 식탁 위에 놓여 있다. 나는 그 사이를 오가며 무언가를 계속 정돈한다. 정돈하는 손끝이 바쁠수록 이상하게 마음은 더 흐트러진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나서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라고 성경이 기록한 그 장면이, 어쩌면 우리 모두의 어느 아침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부지런한 마음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뒤쫓기 시작하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는지조차 잊는다.

마르다의 이야기를 오래 오해했다. 부지런한 사람은 나쁘고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은 좋다는 식의, 성실을 벌하는 이야기처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읽어 보면 예수님은 마르다의 노동을 나무라시지 않는다. 그가 노동 안에서 잃어버린 자리를 아파하실 뿐이다. 접시를 든 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접시를 들고 있는 동안 그의 시선이 손님을 향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손은 부엌에 있는데 마음이 부엌 바깥의 걱정에 붙들려 있으면 어떤 정성도 대접이 되지 않는다. 마르다는 손님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은 자신의 완벽함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완벽함을 향한 애씀에는 늘 원망이 뒤따라온다. 그가 마리아를 향해 “저 아이가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한 그 순간, 우리는 마르다의 지친 얼굴을 본다.

가끔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한다. 마르다가 어느 순간 손을 멈추고, 들고 있던 접시를 조용히 식탁에 내려놓는 장면. 그 접시는 아직 다 씻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다 차려지지 않은 요리가 남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접시를 내려놓는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무거운 마음을 함께 들고 있었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손에 든 무게보다 마음에 얹힌 무게가 훨씬 컸다는 사실을 접시를 놓아 봐야 비로소 안다. 우리는 대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골몰하다가, 정작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는 놓친다. 붙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은 이상하게도 손을 놓아야 찾아온다.

그날 마르다의 부엌에는 아마 몇 가지 냄새가 함께 있었을 것이다. 데워지는 국물의 온기, 화덕에서 나는 마른 나무 냄새, 손끝에 남은 향신료의 잔향. 그 모든 것 위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얹혀 있었다. 마리아는 그 목소리를 들었지만 마르다는 듣지 못했다. 그리 멀지 않은 방에서 흘러나오는 그 음성인데도, 이미 마음이 다른 문을 두드리고 있으면 아무리 가까운 말씀도 문 밖으로 흘러 나가 버린다. 우리의 오늘도 그렇지 않을까. 예배당은 지척인데, 마음은 온갖 열려 있는 창구 앞에 줄을 서 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 누가복음 10:41-42

예수님이 말씀하신 “한 가지”는 아마도 대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이 자리에 함께 계신 분을 향해 시선을 두는 일, 그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잠시 손을 내려놓는 일.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그 한 가지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나머지 아흔아홉 가지가 우리를 놓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답장하지 못한 메시지,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 서류, 다음 주까지 결정해야 할 문제들. 마음의 부엌에는 언제나 아직 씻지 않은 그릇들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그분은 마르다에게 그 아흔아홉을 다 씻고 오라고 하지 않으신다. 다만, 지금은 이 자리에 앉으라 하신다. 이 부드러운 초대는 오히려 우리를 낯설게 한다. 우리는 자격을 다 갖춘 뒤에야 자리에 앉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분주함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게을러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노동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내가 그동안 접시를 씻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누구를 위한 손길이었는지를 다시 묻는 일이다. 마르다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애쓰는 동안 그 손님이 자신의 자리 옆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을 잊었다.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이 지금 이 부엌에 와 앉으셨다는 것을 놓칠 때가 있다. 우리가 준비하는 상은 그분을 대접하기 위한 것인데, 정작 그분은 상을 기다리기보다 우리 곁에 앉기를 원하신다.

어떤 날은 접시를 내려놓아도 마음이 쉽게 정돈되지 않는다. 손을 멈춘 후에도 남은 일들이 귓가에 계속 울린다. 그럴 때는 그저 앉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앉는다는 자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고백이다. 오늘 나는 모든 것을 완벽히 마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 자리에 앉겠습니다, 하는 조용한 항복. 마리아는 앉음으로 예수님의 발치를 자기 자리로 삼았다. 그 자리는 낮은 자리였지만, 그 자리에서 들은 말씀은 결코 낮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의 낮음은 늘 가장 높은 배움의 자리다.

마르다도 결국 그 자리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성경은 나중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가 예수님께 나아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그 고백은 부엌에서 나오지 않았다. 슬픔의 한복판, 무덤 앞에서 나왔다. 어쩌면 그 사이의 어느 날, 마르다도 접시를 내려놓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본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날의 조용한 시간이 훗날의 고백을 자라게 했을 것이다. 신앙의 큰 고백은 대개 부엌에서 이미 시작된다.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돌아보면 나는 자주 마르다처럼 살아왔다. 예배도 준비하고 봉사도 준비하고 관계도 준비하고, 그러다가 정작 예배 안에서 그분의 얼굴을 잊고, 봉사 안에서 그분의 마음을 잊고, 관계 안에서 그분이 붙여 주신 사람의 이름을 잊었다. 준비의 열매는 좋았을지 몰라도, 준비하는 나 자신은 자주 지쳤다. 어느 저녁, 다 씻지 못한 접시를 그대로 두고 부엌 불을 껐던 날이 있다. 그날 밤 나는 오히려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완벽하지 못한 채로 하루를 닫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흔이 넘어서야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말씀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했다. ‘몇 가지’와 ‘한 가지’ 사이의 간격이 크지 않다. 예수님은 완벽한 순위표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오늘 나에게 남겨진 이 한 가지를 붙들어라,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하신다. 아침의 한 가지는 성경 한 구절일 수 있고, 저녁의 한 가지는 조용한 감사 기도일 수 있다.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그분을 향한 자리였느냐가 중요하다. 방향이 있는 노동은 지치지 않고, 방향을 잃은 노동은 아무리 조금이어도 사람을 소진시킨다.

부엌은 사실 인생의 축소판이다. 씻어야 할 접시가 늘 있고, 새로 꺼낼 그릇이 늘 있으며, 정리해도 곧 다시 어질러진다. 마르다의 부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매일 그렇다. 그러므로 접시를 다 씻은 뒤에야 앉겠다는 마음으로는 결코 앉을 수 없다. 아직 씻지 못한 것들이 남은 그대로, 다만 손을 닦고 앉아야 한다.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성실이다. 오늘 하루의 한계를 인정하는 성실, 그리고 그 한계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분이 계심을 믿는 성실.

그러니 오늘 아침 부엌에 서서 접시를 씻고 있다면, 잠시 물을 잠그고 손을 닦아도 좋다. 접시 몇 개는 남겨 두어도 저녁이 오면 다시 씻을 시간이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만 허락된 자리가 있다. 그분이 앉아 계신 옆자리, 아직 아무도 앉지 않은 그 자리. 우리가 그토록 부지런히 준비한 이유는 결국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접시를 내려놓아야 비로소 알게 된다. 분주함의 반대말은 게으름이 아니라 있음이다. 오늘, 조금 덜 씻긴 접시 곁에 있어도, 그분의 음성 곁에 있고 싶다. 그것이 마르다가 마리아에게서 뒤늦게 배운 한 가지 좋은 편이었을 것이다. 그 좋은 편은, 어떤 하루가 아무리 어수선하게 지나가도 결코 우리에게서 빼앗기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오늘 아침 나의 부엌 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 씻지 않은 접시와, 아직 앉지 않은 자리 사이에서, 오늘 나는 그저 손을 닦고 한 걸음 옮기려 한다. 그 한 걸음이면 족하다는 말씀이 참으로 위로가 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