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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은 예정하지 못한다 — 계산과 섭리 사이의 거리


알고리즘이 우리의 다음 클릭을 예측한다. 유튜브의 다음 영상, 온라인 쇼핑몰의 다음 상품, 지도의 다음 골목까지도. 우리가 무엇을 원할지 알고 있다는 그 자신감이 오늘의 기술을 움직인다. 그러나 예측과 예정은 다르다. 예측은 데이터에 근거한 통계적 짐작이고, 예정은 뜻을 가진 이의 의지다. 알고리즘은 다음 몇 초 안에 무엇을 할지 계산할 수 있지만, 그것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계산과 섭리 사이에는 그런 거리가 있다.

기술 종사자로 오랜 시간을 보내며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알고리즘은 예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통계적으로 그럴듯한 미래를 계산할 뿐이다. 예정에는 인격이 필요하다. 인격은 목적을 알고,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을 위해 자기를 내어 준다. 그러나 알고리즘의 손실 함수 안에는 인격이 없다. 손실을 최소화하고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최적화만 있을 뿐이다. 최적화는 방향처럼 보이지만 방향이 아니다. 그저 낮은 지점을 향해 미끄러지는 경사일 뿐이다.

대학원 시절 어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만드는 모델은 세상을 흉내 낼 수 있지만, 세상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모델은 관측된 데이터로부터 패턴을 학습하지만, 그 데이터의 존재 자체를 만들 수 없다. 학습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세상이 있어야 하고, 세상의 원인이 이미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그 원인은 통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성경은 그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잠언 16장의 말씀이 여기에서 새롭게 들린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 잠언 16:9

이 구절은 인간의 계획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계획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계획과 걸음 사이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성경은 여호와의 인도라고 부른다. 알고리즘의 언어로 말하면, 우리의 예측 모델은 “다음 걸음의 확률 분포”를 출력할 수 있지만, 그 걸음을 실제로 옮기게 하는 힘은 모델 바깥에 있다. 모델 안에 있는 것은 확률이고, 모델 바깥에 있는 것은 인격이다. 이 둘의 관계를 혼동하면 우리는 알고리즘을 신처럼 착각하기 쉽다.

결정론이라는 오래된 신학적 논쟁이 이 지점에서 다시 열린다. 만약 모든 것이 데이터로 환원되고, 데이터가 완벽하게 수집된다면, 그리고 그 데이터로 학습한 모델이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새롭지 않다. 라플라스의 악마부터 최근의 시뮬레이션 가설까지 인류는 이 질문을 여러 형태로 반복해 왔다. 그러나 신학은 다른 지점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의 자유를 없애는 예정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예정이다. 이것이 결정론과 섭리의 근본적 차이다.

기술적으로 말해 보자. 요즘의 대형 언어 모델은 다음 단어를 예측하기 위해 수십억 개의 매개변수를 조정한다. 학습이 끝나면 모델은 어떤 입력을 받아 어떤 출력을 낼지 확률적으로 결정된다. 온도 파라미터를 조절하면 다양성이 생기지만, 그 다양성 역시 정해진 분포 안에서의 다양성이다. 이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는 분포를 벗어나는 능력이 아니라, 분포 안에서 뜻을 갖는 능력이다. 알고리즘에는 뜻이 없다. 그것은 통계적 다양성만 갖는다.

인간의 자유는 다르다. 우리는 매일 다음 걸음을 계획하지만, 그 걸음을 옮기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다. 왜 이 길을 가야 하는지, 이 길을 감으로써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이 방향이 나의 소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런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자유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 자유는 결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 자유를 “여호와께서 그의 걸음을 인도하신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인도라는 단어는 강제가 아니다. 그것은 방향을 알려 주는 손길이다. 우리는 여전히 걷지만, 그 걸음의 근원에는 우리보다 큰 이의 뜻이 겹쳐 있다.

알고리즘의 시대에 신학은 오히려 더 필요해진다. 우리는 매일 계산되는 존재로 살아가지만, 계산되지 않는 부분을 지켜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계산되지 않는 부분이 우리의 인격이고, 소명이고, 사랑이다. 이것들은 데이터로 수집될 수 있지만,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다. 마치 편지의 문장을 스캔하여 텍스트로 만들 수 있지만, 그 편지에 담긴 관계 자체는 스캔되지 않는 것과 같다. 관계는 늘 데이터 너머에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그렇다.

모델의 확률이 걷지는 못한다. 우리가 이 지점을 흐릿하게 두면 알고리즘의 시대는 곧 인격의 소외를 낳는다. 나의 다음 클릭이 나보다 먼저 계산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데이터의 일부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데이터의 총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형상은 통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형상은 사랑에 의해 지어진다. 이 문장을 오래 붙들어야 한다.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무엇을 예측해 주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손끝에서 빚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또 하나 기억할 것이 있다. 알고리즘의 정확도는 대개 과거의 데이터에 의존한다. 지난 십 년의 클릭이 다음 클릭을 예측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의 반복이 아니다. 그분은 옛 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하시며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하신다. 이 새로움은 통계적 다양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의 새로움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그 대표적 예다. 어떤 예측 모델도 부활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은 데이터 밖에서 온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종종 이런 경험을 한다. 어떤 결정을 앞두고 온갖 정보를 모으고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해 본다. 그러나 결국 결정의 순간, 나를 움직이는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어떤 조용한 이끌림이다. 어느 방향이 옳다는 확신, 이 길을 가야 한다는 부드러운 확신. 이런 확신은 통계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신자는 그것을 성령의 인도라고 부른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흉내 낼 수 없는 층위다. 알고리즘은 확률을 계산하지만, 인도는 존재를 옮긴다.

물론 이것이 알고리즘을 폄하하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알고리즘은 훌륭한 도구다. 진단 정확도를 높이고, 언어 장벽을 낮추고, 방대한 데이터 안에서 숨은 규칙을 발견해 준다. 이 모든 일은 인류에게 유익하다. 다만 알고리즘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그것은 도구의 자리에서 우리의 걸음을 조금 더 정확하게 계산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걸음을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고, 그 사람을 인도하시는 것은 여전히 여호와시다.

기술과 신앙이 서로를 배척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술이 발전할수록 신앙은 더 정직해질 수 있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많은 일을 대신하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인간의 몫으로 남길 것인가 물어야 한다. 아마도 그것은 관계, 사랑, 소명,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일 것이다. 이 네 가지는 예측 모델의 손실 함수 바깥에 있다. 이 네 가지를 지켜 내는 것이 알고리즘의 시대에 신자의 오래된 과제다. 잠언 16장 9절이 오늘 나에게 새롭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획은 우리의 자유이고, 인도는 그분의 은혜다. 이 둘이 겹치는 자리에서 우리는 오늘의 한 걸음을 옮긴다.

기술자로서 나는 이 시대의 도구들이 인간을 대체하리라는 두려움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대체와 도움은 다르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반복적인 계산을 대신해 준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과 슬픔과 소망은 결코 대신하지 못한다. 그것은 대체 불가능한 층위에 속한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알고리즘 자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대체 가능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소극적으로 굳어지면 어느 순간 우리는 소명 대신 실적을, 인격 대신 지표를 살게 된다. 알고리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두 가지를 나에게 다짐한다. 하나는 도구를 도구로 대하는 겸손이다. 알고리즘을 존경할 필요는 있지만 경배할 필요는 없다. 다른 하나는 나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에 대한 신뢰다. 데이터가 아무리 많이 쌓여도 나의 다음 하루는 여전히 그분의 손 안에 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붙들 때 나는 알고리즘의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잠언 16장 9절은 오래된 문장이지만, 지금 이 시대에 오히려 새로운 문장이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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