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부터 곱추였던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17세가 되기까지 집 밖에 나가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얼마나 자기 몸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지 부모 또한 딸을 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7세가 되던 해에 그 집을 찾아온 수녀님의 설득에 의해 처음으로 천주교의 피정, 우리 개신교에서 말하는 부흥사경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강사로 말씀을 전하신 신부님은 그 날 마침 성령님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들에게 시간을 10여 분 정도 드릴 테니 모두들 밖으로 나가십시오. 이 교회 마당이든지 산이든지 어디든지 나가서 지금 성령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들어오십시오.”
사람들의 무리에 파묻혀 곱추 소녀도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시원한 나무 그늘과 양지 바른 교회의 마당 등 좋은 자리를 다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는 소녀는 자연히 사람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찾다가 한적한 곳에 앉게 되었습니다.
앉고 보니 쓰레기통이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자신은 어딜 가나 쓰레기 밖에 못된다는 생각에 소녀는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한 소년이 오더니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것입니다.
소녀는 용기를 내서 난생 처음으로 물어보자, 그 소년은 캔이나 종이를 찾는다고 말합니다.
그래 그 캔과 종이를 어디에 사용하느냐 물으니, 그것들을 팔아 편찮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약값에 쓴다고 합니다.
그 순간 곱추 소녀는 성령님에 의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 저 쓰레기통에 있는 캔이나 종이 같은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그렇다면 나 같이 쓰레기 같은 인생도 쓸모가 있겠구나! 저 쓰레기를 팔아서 노인들의 약값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쓰레기같은 곱추도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람을 위하여 약이 될 수 있겠구나.’
소녀는 마음으로 큰 결심을 한 뒤, 교회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에 들어가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져 사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우월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문제지만 자기 자신을 열등인생으로 단정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사람이 저마다 자기 부족을 아는 것이 겸손이요, 자기 성장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열등의식에 사로잡히면 큰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무능함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열등의식에 빠져 더 불행하여 집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는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몸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육체의 가시는 그에게 크나큰 열등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내 은혜가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진 열등감을 믿음으로 선용하면 겸손의 은혜도 받고 능력도 받게 된다는 오묘한 진리와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 없는 자들을 택하여 있는 자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육체의 장애로 인한 열등인생, 재능의 부족함으로 인한 열등인생, 배움의 높낮이로 인한 열등인생도 주님의 은혜로 인해 우등인생으로 바뀌어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에게는 열등인생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등인생을 사는 우리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큰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