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아침, 한 부교역자에게 짧은 메시지를 받았다. “혹시 시간 되시면 잠깐 통화 가능할까요. AI가 쓴 설교문을 받아 봤는데, 도무지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서요.” 통화 너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 안에 무언가 끈끈한 무게가 있었다. 그는 며칠 전, 동료 목회자 한 분이 시범 삼아 보내 준 AI 작성 설교문 한 편을 받아 보았다고 했다. 본문은 누가복음 한 단락이었고, 분량과 구성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했다.
“문장이 너무 매끄러워요. 신학적으로도 큰 흠이 없고요. 그런데 읽고 나서 한참을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그는 그 멍한 시간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한참 동안 곱씹어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정체가 어렴풋이 잡혔을 때, 우리에게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매끄러운 설교문 안에서, “사람의 떨림”이 사라져 있더라는 것이었다.

떨림이라는 말은 시적인 표현 같지만, 사실은 매우 구체적인 어떤 흔적을 가리킨다. 설교문을 쓰다가 문장의 흐름이 어색해서 한 단락을 통째로 지워 본 사람, 한 절을 두고 사흘 동안 마음이 머물러 있던 사람, 자신이 그 본문 앞에 설 자격이 있는지 새벽까지 묻고 또 물었던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흔적. 그 흔적은 문장의 표면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결정적인 자리에서 한 줄의 호흡으로, 어색한 한 마디로, 혹은 의도된 침묵으로 남는다.
AI가 작성한 설교문에서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정확히 말하자면, AI는 그 흔적의 흉내까지도 매우 잘 낸다. “오랜 묵상 끝에”라는 표현, “이 본문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라는 도입부, “저 또한 부족한 자입니다”라는 자기 고백의 문장. 이런 문장들은 이제 모형으로도 너끈히 생성된다. 그러나 흉내는 흉내일 뿐, 거기에는 한 사람이 한 본문 앞에서 실제로 통과해 온 시간의 결이 없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 고린도전서 2장 4절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남긴 이 한 구절은, AI 시대의 한복판에서 다시 한 번 묵직한 무게로 우리에게 도착한다.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은 충분히 가능하다. 도리어 우리 시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손쉽게 가능해졌다. 한 권의 설교집 분량을 한나절 만에 생성할 수 있고, 특정 청중층에 맞춘 어휘 톤도 자유자재로 조절된다. 매끄러움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매끄러움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라는 한 가지로 좁혀진다.

전화 너머의 그 부교역자에게 나는 몇 가지 질문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첫째, “사람의 떨림”이 사라진 설교문이 강단에 올라갔을 때, 회중은 무엇을 듣게 되는가. 단어와 문장은 분명히 듣겠지만, 그 단어와 문장을 통해 자신에게 도달해 오는 한 사람의 얼굴은 듣지 못한다. 설교는 본문과 회중 사이에 한 사람의 얼굴이 놓이는 사건이다. 그 얼굴이 사라진 자리에는, 문장만 남는다.
둘째, AI가 생성한 설교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어떠한가 하는 질문은 이미 충분히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그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그 사용을 부추기는 우리 시대의 어떤 압력에 대해 물어야 한다. 매주 한 편씩 새로운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일정의 압박, 더 좋은 표현, 더 매끄러운 흐름, 더 인상적인 도입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 이 압력 자체가 정상적인 것인지에 대해, 한 번쯤 멈춰 서서 묻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셋째, 우리가 AI에게 가장 쉽게 위임하게 되는 작업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 우리 시대 신앙의 한 단면이 비친다. 본문 해설, 예화 검색, 적용점 정리, 설교 개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 위임이 결코 가능하지 않은 자리가 있다. 본문 앞에 한 사람으로 무릎을 꿇고, 자신의 한 주간을 그 본문에 비추어 두는 일이다. 그 자리는 위임될 수도 없고, 모형으로 재현될 수도 없다.

한 가지 더 짚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AI가 생성하는 설교문은 일정한 통계적 평균치 위에서 만들어진다. 수많은 설교 텍스트, 신학 자료, 강해 주석을 학습한 모형이, 가장 그럴듯한 한 편의 글을 생성해 낸다. 그러나 신앙은 평균이 아니다. 신앙은 한 사람의 한 시기를 통과해 가는, 결코 평균이 될 수 없는 어떤 결의 묶음이다. 평균치 위에서 생성된 문장이 한 사람의 결과 만났을 때, 표면적으로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어긋남이 자리 잡게 된다. 그 어긋남이 누적되면, 회중은 어느 순간 직관적으로 그 무언가를 감지한다.
실제로 몇몇 교회에서, AI 설교문의 비율이 높아진 시기를 전후로 회중의 묘한 반응 변화를 보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분위기의 차이지만, 분명히 그곳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들이 조용히 이어진다. 설교 후 회중석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한숨의 결, 예배 후 강단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의 수, 한 주간 본문이 일상의 대화 사이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빈도. 이 모든 작은 결들이, 매끄러운 설교문 한 편의 등장과 함께 미세하게 흔들린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부교역자의 그 한 마디, “사람의 떨림이 사라졌더라”는 그 말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 시대 신앙의 한 가지 시험은, 그 떨림을 끝까지 지켜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매끄러운 문장이 넘쳐나는 시대에, 도리어 어색한 한 마디를 끝까지 어색한 채로 두는 용기.
실용적인 차원에서, 한 가지 작은 제안을 덧붙여 두고 싶다. AI를 사용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손 안에 들어와 있는 도구이고, 도구는 결국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그 결이 달라진다. 본문 사전 정보를 정리할 때,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한눈에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충분히 AI를 활용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자리만은 끝까지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본문과 자신 사이에 흐른 한 주간의 시간, 그 시간이 길어 올린 떨림. 그 떨림이 한 줄의 어색한 문장으로라도 설교문에 남아 있을 때, 회중은 단어 너머의 얼굴을 비로소 보게 된다.
고린도전서 2장의 바울은, 자신이 회중 앞에 섰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고백한다. 그 떨림은 약점이 아니라, 도리어 그가 한 본문 앞에서 한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표지였다. 매끄러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한 가지, 약함 안에서 통과되는 능력. 이것이 우리 시대 AI 설교 시대에 다시 한 번 묵묵히 우리에게 도착하는 한 가지 가르침이다. 떨림은 부끄러워해야 할 흔적이 아니다. 떨림은 한 사람이 한 본문 앞에 정직하게 머물러 있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설교문의 매끄러움이 회중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본문 앞에서 통과한 시간의 결이, 회중의 한 주간을 따라가며 함께 머문다. 그 결을 우리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AI가 쓴 설교문을 마주한 그 주일 아침의 멍함은, 어쩌면 우리 시대가 신앙을 향해 던지는 한 가지 정직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떨림을 끝까지 지킬 것인가, 아니면 매끄러움 앞에서 천천히 떨림을 내려놓을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한 주간을 다시 한 번 묵묵히 마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