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다음 날 주일 예배를 앞두고 한 가지 질문을 다시 떠올립니다. 우리는 왜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은 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모든 예배 달력은 일요일에 맞춰져 있고, 우리는 그 일요일을 ‘주일(主日)’이라 부릅니다. 거룩한 하루가 일곱 번째 날에서 첫 번째 날로 옮겨진 자리에는 어떤 신학적 흐름이 흘렀던 걸까요. 가정의 달 다섯째 주, 토요일에서 주일로 넘어가는 그 길목에서 이 오랜 질문을 한 번 더 펼쳐 봅니다.

안식일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안식일(שַׁבָּת, 샤바트)의 출발은 창세기 2장 2~3절의 창조 기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선언이 첫 자리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십계명에 안식일이 두 번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은 창조의 안식을 근거로(“엿새 동안에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신명기 5장은 출애굽의 해방을 근거로(“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같은 계명의 다른 결을 펼칩니다.
창조의 안식은 ‘기억’의 안식이고, 출애굽의 안식은 ‘회복’의 안식입니다. 한 번은 시작점을 다시 짚어 주고, 한 번은 종이었던 자리에서 자유인이 된 그 변화의 자리를 다시 짚어 줍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은 두 가지 기억이 한 날 위에 겹쳐진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기는 것은 단지 노동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의 백성인지를 잊는 문제였지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출애굽기 20:8, 개역개정)
왜 한국 교회는 일요일에 예배하는가 — 부활과 첫째 날
예수님은 안식일에 여러 차례 회당에 들어가셨고(눅 4:16), 안식일 자체를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라는 선언으로 안식일의 본래 자리를 다시 짚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부활입니다.
네 복음서는 모두 부활의 날을 ‘안식 후 첫날’로 명시합니다(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 일곱째 날의 안식이 끝나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그 첫째 날에 죽음을 이긴 새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선언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매우 일찍부터 ‘주의 날(Κυριακὴ ἡμέρα, 큐리아케 헤메라)’이라 부르며 일요일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은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라고 기록하고, 요한계시록 1장 10절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라고 증언합니다.
2세기 초의 〈디다케〉, 디오뉘소스의 안디옥 서신, 그리고 이그나티우스의 마그네시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약 110년경)에는 이미 “안식일이 아니라 주의 날을 따라 살라”는 권면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부활이 한 주의 첫째 날에 일어났다는 그 한 사실 위에 ‘주일’이라는 이름과 ‘일요 예배’라는 형식이 자라났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1년에 일요일을 제국의 공식 휴일로 선포한 것이 일요 예배의 ‘출발’이 아니라 이미 200년 가까이 자라 온 교회의 실천을 ‘공식화’해 준 사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가 ‘주일 예배’라 부르는 그 형식의 뿌리는 황제의 칙령이 아니라, 빈 무덤을 처음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의 그 새벽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자리 옮김은 한 종교 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부활이라는 한 사건이 한 주의 리듬 자체를 새로 짠 결과였던 것이지요.
주일 성수의 신학 — 옮겨진 안식인가, 새롭게 된 첫날인가
주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신학적 흐름이 있습니다. 첫째, 주일을 안식일이 옮겨진 자리로 보는 입장(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 7항으로 대표되는 청교도 전통). 이 입장은 십계명의 안식일 명령이 그대로 주일에 적용된다고 봅니다. 둘째, 주일을 새 창조의 ‘첫날’로 보는 입장(루터, 칼뱅의 일부 강조점). 안식일이 폐기된 것은 아니지만 주일은 의식법적 안식일이 아니라 부활이 만든 새로운 절기라는 시각입니다. 셋째, 주일을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안식의 상징으로 보는 입장(일부 현대 신학의 강조점). 한국의 보수적 장로교 전통은 대체로 첫째 입장에 가깝게 서 왔습니다.
분당 정자동의 정연철 장로(58)는 한 좌담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희는 주일에 가게 문을 닫는 결정을 내리는 데 8년이 걸렸어요. 가게 매출의 30%가 주일에 나오던 시기였거든요. 그런데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 공부하면서, ‘쉬는 날이 거룩한 날’이라는 게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 신학의 결은 결국 한 가족의 토요일과 주일 위에서 살아납니다.
한국 교회의 토요일과 주일 — 한눈에 보는 신학·전통·실천
| 구분 | 유대교 안식일 | 주일(개신교 일반) | 한국 교회의 강조점 |
|---|---|---|---|
| 날짜 | 금요 일몰~토요 일몰 | 일요일 하루 | 주일 종일을 거룩하게 구분 |
| 신학적 근거 | 창조 + 출애굽 | 부활 + 새 창조 | 창조·부활·종말론적 안식의 통합 |
| 대표 본문 | 출 20:8-11 / 신 5:12-15 | 마 28:1 / 행 20:7 / 계 1:10 | 히 4:9-10 “안식할 때가 남아 있도다” |
| 예배 형식 | 회당 예배·가정 안식 | 주일 예배·성찬 | 주일 대예배 + 주일학교 + 오후 모임 |
| 실천적 강조 | 노동 중지·가족 식탁 | 예배·교제·봉사 | 주일 성수, 가족 단위 예배 참석 |
토요일 저녁의 한 가족 — 주일을 맞이하는 작은 의식
안식일을 ‘저녁부터’ 시작한 유대 전통은 우연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반복된 표현이 그 근거이지요. 한국 교회의 한 가정 사역자인 박혜린 사모(45, 수원 영통)는 매주 토요일 저녁 일곱 시 가족 식탁을 ‘주일 맞이 식탁’이라 부릅니다. “특별한 의식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한 주 동안의 짐을 한 가지씩 말하고, 내일 주일 예배에서 만날 그분께 미리 마음을 들어 두는 짧은 시간을 가져요.”
토요일 저녁의 작은 의식은 다섯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평소보다 30분 일찍 저녁을 마무리하기. 둘째, 가족 한 사람씩 한 주의 감사 하나 짧게 나누기. 셋째, 다음 날 예배 본문을 식탁 위에서 한 절만 함께 읽기. 넷째, 다음 한 주를 위해 한 가지 기도 제목 나누기. 다섯째, 핸드폰을 거실 한곳에 모아 두고 잠자리에 들기. 다섯 가지 모두를 한 번에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한 달 동안 해 보면 그것이 곧 그 가정의 ‘토요일 저녁 안식’이 됩니다.
박혜린 사모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이게 뭐야’ 하는 표정이었어요. 그런데 한 달이 지나니까 토요일 저녁 일곱 시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식탁에 모여요. 한 주 동안의 짐을 한 가지씩 말하는 그 짧은 시간이 다음 날 예배의 자리를 미리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신학은 결국 한 가족의 식탁 위에서 가장 진하게 살아납니다. 옮겨진 안식의 자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본문은 어쩌면 신학 사전이 아니라, 토요일 저녁 일곱 시의 한 가족 식탁입니다.
“우리에게는 안식할 때가 남아 있도다” — 종말론적 안식
히브리서 4장 9~10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한 문장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이 본문은 안식일도, 주일도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니라 마지막 날의 ‘참 안식’을 가리키는 표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주일은 그래서 한 주의 ‘끝’이 아니라 다음 한 주의 ‘시작’이며, 동시에 마지막 그 안식을 향한 ‘예고편’입니다. 한국 교회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가장 깊은 이유는 단지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도,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만도 아니라, 마지막 날 모든 백성이 누리게 될 그 안식을 매주 한 번 미리 살아 보기 위해서입니다. 토요일에서 주일로 넘어가는 그 짧은 밤이, 우리에게 그 ‘미리 살아 보기’의 자리를 매주 허락해 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안식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와 같이 토요일에 예배해야 하지 않을까요?
초대 교회는 부활의 사건 이후 매우 일찍부터 ‘주의 날(일요일)’에 모였고, 사도행전 20장 7절과 요한계시록 1장 10절이 이를 증언합니다. 토요일 예배가 “원래의 자리”라는 주장은 신약의 증언과 초대 교회의 실천 모두와 거리가 있습니다. 다만 안식일의 정신(노동의 중지·창조의 기억·해방의 기념) 자체는 주일 안에 통합되어 살아납니다.
Q2. 주일에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의료·교통·돌봄 등 사회의 안식을 가능하게 하는 직무는 오랜 신학적 전통 안에서 “필요의 일(works of necessity)”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칼뱅과 청교도 전통 모두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주일 노동이 일상이 된다면, 한 주 다른 하루를 ‘주일에 준하는 안식의 자리’로 의식적으로 구분하는 실천이 권장되어 왔습니다.
Q3. 주일에 외식하거나 쇼핑하는 것은 죄인가요?
한국 보수 장로교 전통은 주일에 다른 사람의 노동을 사용하는 일을 자제할 것을 권면해 왔습니다. 다만 이를 ‘죄/죄 아님’의 이분법으로만 다루기보다는, 가정마다 ‘우리의 주일은 어떤 모양이어야 할까’를 함께 정하는 결단의 자리로 두는 편이 더 건강합니다. 부부가 함께 본문(특히 사 58:13-14)을 읽고 가정의 원칙을 세워 보세요.
Q4. 자녀에게 주일 성수를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요?
‘하지 말 것’의 목록보다 ‘하면 좋을 것’의 목록을 먼저 만들어 주세요. 주일 점심 가족 식탁 함께 차리기, 한 주 감사 한 가지씩 나누기, 한 절 함께 외우기,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을 위해 짧게 기도하기 등. 자녀에게 주일은 빼앗기는 날이 아니라 채워지는 날로 기억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Q5.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안식이라는 말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요?
‘이미’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안식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이고, ‘아직’은 그 안식이 마지막 날 완성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그 두 시제 사이에 서 있습니다. 이미 시작된 안식을 미리 맛보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안식을 갈망하는 자리. 주일 예배는 그 두 시제를 한 번에 살아 보는 가장 가까운 시간입니다.
※ 본 글의 등장인물 이름과 사례는 신학 자료의 결을 설명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이며, 실제 인물·기관과 무관합니다. 신학적 견해는 한국 보수 장로교 전통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으며, 교단·신학적 입장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