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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은 이웃을 모른다 — 추천의 시대에 다시 묻는 사랑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는 가장 먼저 추천을 받습니다. 밤사이 알고리즘이 골라 놓은 뉴스, 영상, 상품, 그리고 만나야 할 사람들까지. 우리가 무엇을 볼지, 무엇을 살지, 누구의 소식을 접할지를 점점 더 많은 부분 인공지능이 대신 정해 줍니다. 추천 시스템은 놀랍도록 효율적입니다.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나보다 먼저 압니다. 그러나 이 편리함 앞에서,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한 가지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야 합니다. 알고리즘이 그토록 정교하게 나를 안다면, 과연 그것은 나의 ‘이웃’도 알고 있을까요.

예수께서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실 때, 둘째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를 드셨습니다. 그러자 한 율법교사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에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답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도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갔지만, 멸시받던 사마리아인 하나가 그를 돌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이웃은 미리 정해진 범주가 아니라, 내가 다가가 사랑할 때 비로소 생겨나는 관계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 누가복음 10:27

그런데 추천 알고리즘의 작동 원리는 이 이웃 개념과 정반대의 방향을 향합니다. 알고리즘은 나와 ‘비슷한’ 것을 끌어모읍니다. 내가 좋아한 것과 유사한 콘텐츠,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 내 취향에 맞는 세계를 정교하게 큐레이션해 줍니다. 그 결과 우리는 점점 더 나와 닮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나와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점점 멀어집니다. 이것을 흔히 ‘필터 버블’이라 부릅니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그 ‘다른 사람’을 시야에서 지워 버립니다.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

강도 만난 자는 사마리아인에게 ‘추천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알고리즘이 있었다면 그를 건너뛰라고 조언했을 것입니다. 인종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아무런 공통의 관심사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효율의 관점에서 그를 돕는 일은 시간 낭비였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쓰고, 자기 짐승에 태우고, 여관 비용까지 부담하는 일은 어떤 ‘최적화’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비효율적인 멈춤이, 예수께서 칭찬하신 이웃 사랑의 본질이었습니다. 사랑은 알고리즘이 계산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의 영적 위험 하나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공지능이 악해서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유사성’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도록 우리를 길들인다는 점입니다. 나와 비슷한 것은 가깝게, 나와 다른 것은 멀게. 이 원리가 우리 마음 깊이 스며들면, 우리는 사랑조차 취향의 문제로 여기게 됩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사랑하고, 불편한 사람은 차단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주께 행한 것이라는 사랑. 그것은 유사성이 아니라 은혜에 뿌리를 둔 사랑입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의 모습

그렇다고 인공지능 자체를 거부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추천 기술은 수많은 유익을 줍니다.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찾고, 좋은 책과 음악을 만나며, 흩어진 지식을 연결합니다. 도구는 도구일 뿐, 문제는 그 도구가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도록 무방비로 내어 주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술을 사용하되, 기술이 빚어내는 사람됨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선별된 세계임을 의식하고, 그 바깥에 알고리즘이 결코 추천하지 않을 얼굴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천은 의외로 단순한 데서 시작됩니다. 화면을 잠시 내려놓고, 추천되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 알고리즘이 묶어 준 비슷한 무리 바깥으로 한 걸음 나가 보는 것. 같은 엘리베이터를 탄 이웃, 매일 마주치지만 이름을 모르는 경비원,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친척. 이들은 어떤 추천 목록에도 오르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에 더욱 나의 이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강도 만난 자를 만났듯, 참된 이웃은 대개 우리의 계획과 취향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인공지능은 점점 더 정교하게 우리를 알아 갈 것입니다. 우리의 클릭과 머무름, 망설임까지 데이터로 읽어 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모델도 끝내 계산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이유 없이 몸을 굽히는 사랑, 손해를 감수하고 곁에 머무는 헌신, 자기와 아무 상관 없는 자의 상처를 자기 일처럼 싸매는 긍휼. 그것은 통계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데이터가 아니라 은혜의 사건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10:36-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명령은 추천 알고리즘이 결코 우리에게 건넬 수 없는 말입니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이미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보여 줄 뿐, 우리가 아직 사랑하지 못하는 이를 사랑하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부릅니다. 비슷한 것들의 안락한 거품을 깨고, 다른 이에게로 건너가라고. 인공지능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더 나은 알고리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결코 추천하지 않을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는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화면 너머, 추천 목록 바깥에, 오늘도 우리의 멈춤을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사도행전이 그린 그 공동체의 놀라움은 다양성에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한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어떤 인간적 알고리즘으로도 묶이지 않을 사람들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유사성의 원리를 따랐다면 그 교회는 결코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필터 버블을 깨뜨리는 능력이었습니다. 담을 헐고, 멀리 있던 자를 가까이 오게 하며, 원수 되었던 둘을 하나로 만드는 화해의 사건. 오늘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도 바로 이 경계를 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두려움도 맹신도 아닌 분별이어야 합니다. 기술이 주는 선물은 감사함으로 누리되, 그 기술이 우리의 사랑의 반경을 좁히지 못하도록 깨어 있는 것. 오늘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결국 이것입니다. 나는 화면이 보여 주는 세계 안에만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그 바깥으로 한 걸음 건너가 추천받지 못한 이웃의 얼굴을 마주할 것인가. 알고리즘은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 답은 오직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우리의 발걸음 속에만 있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