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손을 멈춘 적이 있다. 따뜻한 물이 손등을 타고 흐르고, 그릇에 묻은 기름기가 거품 속으로 풀려 나가는 그 평범한 순간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고요해졌다. 하루 종일 분주하던 머릿속이 그릇 하나를 닦는 일 앞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거창한 기도도, 특별한 묵상도 아니었다. 그저 그릇을 씻고 있었을 뿐인데, 그 자리가 묘하게 거룩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흔히 거룩한 시간과 일상의 시간을 나눈다. 예배의 자리는 거룩하고, 부엌의 자리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기도하는 무릎은 경건하고, 설거지하는 손은 그저 노동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만 계시고, 부엌의 개수대 앞에는 안 계신 분일까. 만일 그분이 어디에나 계신 분이라면, 거룩하지 않은 자리란 애초에 없는 것이 아닐까.
17세기 프랑스의 한 수도원 부엌에 로렌스라는 수사가 있었다. 그는 평생 동안 화려한 직책을 맡은 적이 없었다. 그가 한 일은 대부분 수도원의 부엌일과 허드렛일이었다. 냄비를 닦고, 음식을 나르고, 바닥을 쓸었다. 그런데 그는 그 단순한 노동 속에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지냈다고 고백했다. 그는 말했다. 부엌에서 냄비를 닦는 일도, 성찬을 받드는 일만큼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다고.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한다고 표현했다. 임재는 거창한 경험이 아니라, 지금 이 일을 하시는 분이 나와 함께 계심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냄비를 닦는 동안에도 그분을 향해 마음을 돌리고, 음식을 나르는 동안에도 조용히 그분께 말을 건넸다. 그렇게 그의 부엌은 작은 성소가 되었다. 거룩함은 장소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바꾸는 것임을 그는 손으로 살아 냈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나는 설거지를 하며 그 수사의 부엌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남긴 한 문장을 생각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이 놀라운 이유는, 그것이 가리키는 일의 범위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설거지도, 빨래도, 출근길의 운전도, 서류 정리도 모두 포함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골로새서 3:23~24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흠 없이 해내라는 명령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읽어 보니 그것은 완벽함에 대한 요구가 아니었다. 핵심은 마음을 다하여와 주께 하듯이라는 두 표현에 있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인정받든 받지 못하든, 그 일을 하시는 분이 나와 함께 계심을 기억하며 정성을 들이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들로 채워져 있다. 매일 차리는 밥상, 매일 닦는 바닥, 매일 처리하는 사소한 업무들. 누구도 박수를 보내지 않고, 잘했다고 칭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안 하면 티가 나지만 잘해도 표가 나지 않는, 그런 보이지 않는 수고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바울은 말한다. 사람이 보지 않아도 주님은 보고 계신다고. 그러니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그분의 시선을 향해 일하라고.
이것은 노동을 미화하는 말이 아니다. 고된 일을 억지로 즐기라는 주문도 아니다. 다만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인정받기 위해 일할 때 우리는 쉽게 지친다. 알아주지 않으면 억울하고, 비교당하면 초라해진다. 그러나 그분을 향해 일할 때, 가장 작은 수고에도 의미가 깃든다. 아무도 모르는 설거지 하나가, 그분과 나 사이의 조용한 대화가 된다.
사소한 일이 빚어 가는 것
거룩함은 대개 큰 사건이 아니라 작은 반복 속에서 자란다. 우리는 인생을 바꿀 결단의 순간을 기다리지만, 정작 우리를 빚어 가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선택들이다. 오늘 설거지를 정성껏 할 것인가 대충 할 것인가. 그 작은 갈림길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성품이 된다. 큰 거룩은 작은 성실의 누적 위에 세워진다.
나는 이제 설거지를 조금 다르게 한다. 여전히 귀찮은 날이 있고 빨리 끝내고 싶은 날도 있다. 그러나 가끔은 의식적으로 손의 속도를 늦춘다. 따뜻한 물의 감촉을 느끼고, 깨끗해지는 그릇을 바라보며, 이 단순한 일 가운데 함께 계신 분께 마음을 돌린다. 그 잠깐의 돌이킴이 하루의 결을 바꾼다. 분주함에 떠밀려 가던 마음이, 그 자리에서 잠시 닻을 내린다.

마르다의 부엌에서
복음서에는 부엌에서 분주했던 한 여인이 등장한다. 마르다는 예수를 집에 모시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했다. 그 섬김 자체는 귀한 것이었다. 문제는 일이 아니라, 일에 떠밀려 정작 함께 계신 분을 잊어버린 마음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를 모질게 나무라신 것이 아니라,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그것은 일을 당장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라, 일하는 동안에도 나를 놓치지 말라는 따뜻한 초대였다.
나는 부엌에서 종종 마르다가 된다. 해야 할 일에 쫓겨 마음이 분주해지고, 어느새 함께 계신 분을 잊는다. 그러나 그분은 오늘도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신다. 일을 멈추라고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손 위에 나도 함께 있다고. 그 부르심을 기억하는 순간, 분주하던 부엌은 다시 작은 성소가 된다.
거룩함과 분주함은 늘 같은 부엌에 함께 머문다. 둘을 가르는 것은 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일 가운데 누구를 향해 마음을 두느냐다. 오늘도 나는 그 가느다란 차이를 손끝으로 연습한다.
어쩌면 영성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산속의 수도원이나 새벽의 기도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저녁 당신의 부엌 개수대 앞에도 있다. 빨랫감을 개는 손끝에도, 아이의 신발을 정리하는 허리에도, 늦은 밤 책상을 정돈하는 마음에도 있다. 거룩한 자리는 따로 마련된 곳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다. 그 자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함께 계신 분을 향해 마음을 돌리는 작은 돌이킴 하나다.
오늘도 하루가 저문다. 싱크대에는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고, 몸은 피곤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평범한 수고 앞에서 조금 덜 한숨 쉬려 한다. 그릇을 씻으며 드리는 이름 없는 기도가, 어쩌면 가장 정직한 예배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그 한 문장을 손끝에 새기며, 오늘의 마지막 그릇을 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