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새벽 다섯 시, 거실의 마룻바닥에는 창문 너머 가로등에서 흘러 들어온 빛 한 줄기가 비스듬히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가족은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고, 식탁 위의 시계는 조용히 초침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새벽의 거실은 한낮의 거실과 같은 공간이지만 사실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구의 자리와 색은 그대로였지만, 모든 사물의 윤곽이 조금 더 부드러워져 있고, 모든 소리가 조금 더 멀리에서 들려오는 자리가 새벽의 거실이었습니다.
마룻바닥의 그 한 줄기 빛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겨 보았습니다. 빛은 거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소파의 다리 한 쪽을 한 번 만지고는, 책장의 가장 아랫칸에서 멈춰 있었습니다. 책장의 가장 아랫칸에는 오래된 성경책 한 권이 늘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고, 새벽의 가로등 빛은 그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 두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길고 깊은 기도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족이 잠들어 있는 새벽 다섯 시는 어쩌면 한 가정에서 가장 정직한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의 일정도, 누구의 호명도 도착하지 않는 시간이며, 휴대전화의 알림조차 잠시 멀어져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한 주 동안 처음으로 주어진 자리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새벽의 거실은 깊은 침묵 그 자체가 사실은 가장 큰 위로가 되어 우리 곁에 머무르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마루의 한 모서리에 앉아, 가로등 빛이 만들어 준 그 한 줄기 위에 손바닥을 잠시 내려놓아 보았습니다. 가로등의 빛은 결코 뜨겁지 않았고, 형광등의 빛처럼 차갑지도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가로등에서 출발한 빛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새벽의 푸른 기운인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는 부드러운 결의 빛이었습니다. 그 빛 위에 손을 얹고 한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는 동안, 마음 깊은 곳에서 한 줄의 말씀이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 시편 46편 10절
한 주 동안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가만히 있는 시간’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는지, 새벽의 거실은 조용히 묻고 있었습니다. 휴대전화 화면을 향한 손가락의 움직임, 일정표 위에 끊임없이 늘어 가는 작은 표시들, 약속의 사이사이에 끼워 넣은 짧은 통화. 어느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니었지만, 그 모든 흐름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자리’를 우리가 채워 두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마음의 한 자리에서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이사야 30장 15절은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이라는 한 줄을 적어 두었습니다. 조용함과 잠잠함, 그리고 신뢰. 이 세 단어는 새벽의 거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결심하기 이전에, 무엇을 결단하기 이전에, 우리가 잠시 멈춰 서서 ‘조용함’으로 돌아오는 일이 사실은 새벽의 거실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한 줄기 빛 위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해졌습니다.
창문 너머 가로등 옆을 한 사람의 발걸음이 천천히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군가의 출근길일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일찍 시작된 산책일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긴 야근의 마지막 자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한 사람의 발걸음 소리에 잠시 시선을 두면서, 새벽 다섯 시의 한국 도시 곳곳에서 비슷한 자리에 잠시 멈춰 서 있을 수많은 이웃들을 위해 짧은 한 줄의 기도를 마음속에 적어 보았습니다. 새벽의 침묵은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의 작은 시작이 동시에 흐르고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새삼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다시 책장 아랫칸의 성경책으로 시선이 돌아갔습니다. 한낮에 펴는 성경과, 새벽 다섯 시의 거실에서 손에 닿는 성경은 같은 책이지만 조금 다른 자리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옵니다. 한낮에는 종종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페이지가 먼저 펼쳐지지만, 새벽에는 ‘어떤 자리에 다시 서야 하는가’에 관한 페이지가 먼저 손끝으로 다가옵니다. 시편 46편이 그 자리에 놓이고, 이사야 30장이 그 옆에 잠시 손을 얹고, 그리고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멀리서 한 호흡을 고르고 있는 듯한 새벽이었습니다.

한 호흡 한 호흡을 다시 가다듬으며, 그 새벽의 거실에서 마음에 두 가지 작은 결심을 남겨 두었습니다. 첫 번째는, 다음 한 주 동안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모든 알림을 잠시 끄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마련해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아도 좋고, 거창한 의식이 아니어도 좋았습니다. 그저 식탁 한쪽이나 베란다의 한 모서리, 출근길 지하철 한 정거장의 거리만큼이라도, ‘잠잠하고 신뢰하는’ 자리를 한 호흡 마련해 두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결심은, 새벽의 이 한 줄기 빛이 가르쳐 준 ‘부드러운 결의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도 한 번 더 흘려보내는 일이었습니다. 한 주 동안 만나게 될 사람 중에는 분명히 어깨가 무거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큰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해도 좋지만, 짧은 안부 메시지 한 줄이나 한 잔의 따뜻한 차 한 잔이라도, 새벽의 빛처럼 부드러운 결로 다가갈 수 있도록 마음에 새겨 두었습니다.
이윽고 가로등 빛이 마룻바닥에서 천천히 옅어져 갔습니다. 거실의 한 모서리에는 새벽의 푸른 기운이 점차 짙어졌고, 환기창 너머에서는 첫 새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한 번 들려왔습니다. 새벽 다섯 시의 거실은 그렇게 침묵으로 시작되어 작은 음향으로 깨어나고 있었습니다. 시편 46편의 그 한 줄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라’는 부드러운 초대였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새벽이었습니다.
그 새벽의 침묵이 가르쳐 준 한 줄을 마음에 적어 둡니다. 가만히 있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힘이 자라난다는 사실, 잠잠한 자리에서 가장 단단한 신뢰가 빚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새벽의 부드러운 가로등 빛 위로도 여전히 하나님이 한 가정을 지키시며 한 도시를 품으시며 한 새벽을 깨우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오월 마지막 주 금요일의 새벽은, 그렇게 한 줄 한 줄 우리의 마음 안쪽에 ‘은혜의 자리’를 한 칸 더 마련해 주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