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밤 열한 시 반, 식구들이 다 잠든 뒤에야 부엌으로 나왔다. 형광등은 켜지 않고 식탁 위 작은 보조등 하나만 켰다. 노란 등불 아래에는 낮에 끓여 두었던 보리차 한 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손으로 잔을 감싸 보니 이미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끓이지 않고 그대로 식탁 앞에 앉았다. 부엌 창문 너머에서는 옆 동 어느 집의 형광등이 마지막으로 깜빡이며 꺼지는 중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마음이 분주했다. 일터에서 회의가 길게 이어졌고, 점심을 거의 거른 채 오후까지 보고서를 다듬었다. 저녁에는 가족 단톡방에 올라온 안부 메시지에 답을 못한 채 잠시 미뤄 두었다. 그런 하루의 끝에 식어 버린 보리차 한 잔과 마주 앉으니, 입에서는 정작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기도를 하려고 했는지, 한숨을 쉬려고 했는지조차 잘 구분되지 않는 그런 자리였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한 장면이 그 침묵 위로 천천히 떠올랐다.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 어귀에 서 있던 그 밤이었다. 큰 바람이 산을 가르고, 지진이 땅을 흔들고, 불이 지나갔지만, 여호와는 그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그 뒤에 세미한 소리가 들렸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한국어 성경의 그 형용사는 늘 마음에 오래 머문다. 세미하다는 단어는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는, 그래서 듣는 사람의 자세가 충분히 낮아지지 않으면 결코 닿지 않는 그런 음성을 가리킨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 열왕기상 19장 12절
식어 버린 보리차의 표면 위로 보조등의 노란 빛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오늘 하루 종일 내가 들으려고 했던 음성은 모두 큰 바람이나 지진의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회의실에서 더 또렷한 결정의 음성을 듣고 싶었고, 보고서 위에서 더 분명한 방향의 음성을 듣고 싶었고, 가족 단톡방에서 더 따뜻한 위로의 음성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그분께서 머무르시는 자리는 이 한밤중 부엌의 미지근한 잔 위였는지도 모른다.
엘리야는 그 세미한 음성을 듣자마자 겉옷으로 얼굴을 가렸다. 신학자들은 그 동작을 두 가지로 풀어 왔다. 하나는 거룩하신 분 앞에 자기를 감추는 경외의 동작이고, 다른 하나는 큰 사건들 앞에서 부풀어 있던 자기 기대를 내려놓는 비움의 동작이라고 했다. 두 가지 해석 모두 마음에 닿았다. 거룩한 음성은 우리의 거창한 기대를 통과하지 못한다. 부풀어 있는 마음 위에서는 작은 음성이 흘러내릴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보리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어 보았다. 미지근한 액체가 입안에 천천히 퍼졌다. 그 평범한 맛 속에서 어떤 큰 깨달음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가라앉음 속에서야 비로소 그분께 한 줄을 드릴 수 있었다. 오늘 하루도 많이 분주했다고. 들어야 할 음성을 잘 듣지 못한 채 큰 소리들만 좇아 다녔다고. 그 짧은 고백 위에서, 어디선가 아주 작은 음성이 마음 한 켠을 톡 두드리는 듯한 감각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졌다.
영성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어느덧 여러 해가 되었다. 처음에는 큰 사건들만 기록하려고 했다. 응답된 기도, 갑작스러운 깨달음, 누군가에게 받은 인상 깊은 한 마디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기장에는 점점 작은 자리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식어 버린 보리차 같은 자리, 빨래를 미루어 두고 멍하니 베란다에 선 자리, 출근길 신호등 앞에서 잠시 마주친 어느 노인의 등 같은 자리. 그 작은 자리들이 결국 영성의 결을 만든다는 것을, 부엌의 식탁 앞에서 다시 천천히 확인하는 밤이었다.
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보리차의 향이 식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따뜻할 때는 김과 함께 곧장 코로 올라오던 그 향이, 식고 나면 입안에서 더 천천히 머문다. 어떤 음성도 그렇다. 큰 음성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세미한 음성은 입안의 향처럼 오래 남아 마음에 스민다. 엘리야가 동굴에서 들은 그 음성은 어쩌면 한순간에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일평생을 두고 그 짧은 음성을 다시 곱씹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창문 너머로 다시 한 번 바깥을 내다보았다. 옆 동의 마지막 형광등도 이제는 완전히 꺼져 있었다. 골목은 푸르스름한 가로등 빛 아래에서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도시의 큰 소리들이 일제히 잠이 든 그 시간, 부엌의 보조등 하나만이 작게 빛나고 있었다. 그 작은 빛이 오늘 밤의 호렙산 동굴 어귀였다고, 영성 일기의 한 페이지에 짧게 적어 두기로 했다.
일기장을 펼치고 펜을 들었다. 오늘 들은 음성을 글로 옮기는 일은 늘 위태롭다. 너무 또렷하게 옮기려고 하면 거짓이 섞이고, 너무 모호하게 두면 곧 잊혀진다. 그래서 가능한 한 짧게, 사실 그대로만 쓰려고 노력한다. 오늘 밤은 이렇게 적었다. 식어 버린 보리차 한 잔 위에서, 세미한 음성을 한 번 비껴 듣고 다시 듣고 또 비껴 들었다. 이 한 줄이면 충분할 것 같다.
식탁의 작은 보조등 옆에는 며칠 전 아내가 꽂아 둔 작은 들꽃 두 송이가 컵 안에 담겨 있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들에서 흔히 보이는 그런 꽃이었다. 한낮의 햇빛 아래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던 꽃들이, 한밤중 보조등의 노란 빛 아래에서는 묘하게 또렷한 윤곽으로 살아났다. 그 작은 윤곽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세미한 음성은 우리에게도 자기 윤곽을 가진 사건이다. 다만 그 윤곽은 한낮의 환한 빛 아래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부엌의 보조등처럼 다른 빛이 잦아든 자리에서야 비로소 그 모양을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영성 일기를 쓰는 시간은 늘 늦은 밤이 된다. 일터의 환한 형광등 아래에서, 회의실의 빔 프로젝터 빛 아래에서, 카페의 LED 등 아래에서 들었다고 착각한 음성들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메아리였음을 깨닫는 일은 거의 한밤중에 일어난다. 보조등 하나만 켜진 부엌, 식어 버린 잔 한 개, 들꽃 두 송이의 자리에서야 비로소 그 진위를 가려낼 수 있는 것이다. 영성 훈련은 결국 빛의 양을 줄이는 훈련일지도 모른다. 큰 빛을 한 차례씩 꺼 두는 그 단순한 동작이, 세미한 음성을 알아듣는 귀를 천천히 자라게 한다.
잔을 마저 비우고 일어났다. 보조등을 끄기 전에 잠시 손을 모았다. 거창한 기도가 아니었다. 다만 내일도 큰 바람과 지진과 불의 자리에서 그분을 찾지 않게 해 달라고 했다. 식어 버린 잔 같은 자리, 미지근한 침묵 같은 자리에서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알아챌 수 있는 귀를 달라고 했다. 보조등을 끄자 부엌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마음 한 켠은, 오랜만에 조금 따뜻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