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목요일 아침, 환승역 9호선 플랫폼에서 다시 4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길이었다. 출근 시간의 그 길은 늘 같다.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은 채 빠르게 앞서고, 누군가는 손에 든 종이컵을 흘리지 않으려 조심스럽고, 누군가는 휴대폰의 작은 화면 안에 머리를 묻고 걷는다. 발걸음들은 서로 부딪히지 않을 만큼만 좁게 흘러간다. 그 좁은 흐름 안에서 우리는 모두 익명이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고, 누구의 어제가 어떠했는지 모르고, 누가 어떤 마음으로 오늘의 첫 걸음을 떼었는지 모른다.

나는 계단의 중간쯤에서 한 번 멈칫했다. 멈칫한 이유는 별것이 아니었다. 앞서가던 한 사람이 신발 끈을 다시 묶기 위해 잠시 옆으로 비켜선 것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 그 사람의 등이 보였다. 회색 자켓의 어깨가 살짝 처져 있었고, 머리카락 끝에는 비를 맞고 마른 자국 같은 곱슬거림이 있었다. 그 등은 누군가의 등이었다. 그 사람도 어제 어떤 식탁에서 떡을 떼었을 것이고, 어떤 잠을 잤을 것이고, 오늘의 새벽에 어떤 마음으로 신발을 신었을 것이다. 환승역의 군중 속에서 그 등이 잠시 분리되어 보인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이 마음 안쪽 어딘가를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은 이 군중 전체를 보고 계시는가, 아니면 이 군중 안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고 계시는가.
흔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우리’라는 단어는 묘하게 두루뭉술한 데가 있다.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 민족, 우리 인류 — 그 모든 ‘우리’를 위로 모아 보면 결국 환승역 계단을 빠르게 흘러가는 익명의 군중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성경의 신앙은 다른 자리에서 시작한다. 성경은 ‘우리’에서 ‘한 사람’으로 좁혀 들어간다. 잃은 한 마리 양,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는 한 사람, 모태에 있을 때부터 보신 한 사람. 그 한 사람의 자리에 도달하지 않는 신앙은 결국 군중의 신앙이 되고 만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 시편 139:1-3
시편 139편의 시인은 군중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는 1인칭 단수로 노래한다. “나의 앉고 일어섬”, “나의 생각”, “나의 모든 길”, “나의 눕는 것”. 그 단수의 자리 안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이 단지 군중의 한 단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정확히 식별되고 있는 한 인격임을 발견한다. 환승역의 군중 안에서 신발 끈을 다시 묶기 위해 잠시 옆으로 비켜선 그 한 사람, 그 사람의 어깨가 살짝 처진 그 등, 그 머리카락의 곱슬거림 — 그것을 보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시선’이라고 부르는 것의 본래 무게다.
계단을 다시 내려가며 나는 군중을 더는 군중으로만 보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앞에서 빠르게 걸어가는 양복 차림의 한 사람도, 휠체어 옆에서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걷는 노부부도, 이어폰을 너무 크게 꽂아 음악이 새어 나오는 학생도, 한 손에 작은 케이크 상자를 안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오는 누군가도 — 군중의 한 단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한 사람씩 식별되고 있는 한 인격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 앞에서는 도시의 출근길도 단순한 통과의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큰 익명의 자리에서 가장 작은 단수가 발견되는 자리, 군중의 한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알아보시는 분의 시선이 흐르고 있는 자리다.

4호선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 막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발씩 앞으로 다가섰고, 그 한 발의 거리는 누구에게도 양보되지 않는 거리였다. 나도 그 한 발의 거리 안에 들어섰다. 그러나 마음 안쪽에서는 조금 다른 한 발을 떼고 있었다. 군중 안에서 한 사람을 발견하는 한 발, 익명의 흐름 속에서 한 인격을 알아보는 한 발, 그리고 그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시는 시선 안으로 나 자신도 한 번 더 들어서는 한 발.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좁은 입구로 일제히 빨려 들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한 번 더 생각했다. 이 안에 있는 누구도 하나님께 단지 군중의 한 단위가 아니다. 누구도 익명이 아니다. 신발 끈을 다시 묶던 그 사람도, 옆 사람의 어깨에 부딪혀 잠시 멈칫했던 그 사람도,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던 나도 — 모두 한 사람씩 살펴지고 있는 한 사람이다. 그 사실 위에 오월의 출근길이 흐르고 있고, 그 흐름 안에서 우리는 매일 한 번씩 같은 발견을 새로 하게 된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 누가복음 12:7
도시는 우리를 자주 군중으로 느끼게 한다. 환승역의 계단, 신호등 앞의 인파, 엘리베이터의 짧은 침묵 — 그 모든 자리는 우리에게 ‘익명의 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강하게 새긴다. 그러나 신앙은 그 감각의 가장 깊은 자리까지 내려가서 거기서 한 가지를 더 묻는다. 정말로 너는 익명인가. 정말로 너의 오늘은 누구도 보지 않는 시간인가. 시편의 노래는 거기에 단정히 답한다. 아니다. 너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는 분이 계신다. 너의 모든 길과 눕는 것까지 살피시는 분이 계신다. 너는 군중 속의 한 단위가 아니다. 너는 그분 앞에서 한 사람이다.
환승역의 계단 위에서 시작된 짧은 묵상이 오늘 하루의 결심으로 이어졌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회의실에 앉든, 어떤 카페의 한 자리에 잠시 앉아 커피 한 잔을 시키든 — 군중의 한 단위로 그 사람을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결심. 그것은 어쩌면 오늘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신앙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는 일. 그것은 작은 일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그 방식과 가장 닮은 일이기 때문이다.
오월의 출근길이 늘 그렇듯, 환승역의 계단은 또 다른 사람들로 채워지고 비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흐르는 시선은 여전히 한 사람씩에게 머문다. 군중은 흩어져도 시선은 흩어지지 않는다. 그 시선의 자리에서 오늘 하루를 다시 시작한다.